▲장면 국무총리
국가기록원
독실한 가톨릭 신자
장면은 1899년 8월 28일, 서울 종로구 적선동 외가에서 태어났다. 평양 출신의 아버지 장기빈과 어머니 황루시아 사이 3남 4녀 중 장남이었다. 어릴 때 이름은 '지태'였는데, 이후 '공부를 열심히 하라'는 뜻으로 본명은 면(勉)으로 지어줬다고 한다. 장면의 호는 '운석(雲石)'이다.
장면의 아버지는 인천 해관(요즘으로 치면 세관)에서 근무했다. 그래서 어린 시절 인천에서 성장했다.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성당에 다녔다. 인천성당의 부설 박문학교 보통과, 고등과, 인천공립심상소학교를 수료한 다음 수원농림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수원 농림 2학년 때인 1916년 6월, 서로 선도 보지 않고 김옥윤(17)과 결혼했다.
수원농림을 졸업한 뒤 미국으로 유학가고자 YMCA에서 영어공부를 했다. 1920년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 자격으로 미국 유학을 떠났다. 뉴욕 맨해튼 가톨릭대학 영문학과에 진학해 부전공으로 교육학을 이수한 뒤 1925년에 졸업했다.
귀국길에 로마에서 열린 한국 순교자 시복식(諡福式, 죽은 뒤 복자품에 오르는 예식)에 한국천주교청년회 대표로 참석했다. 이때 교황 비오 11세를 알현하고, 가톨릭 수뇌부와 교류한 일은 훗날 그가 외교활동을 펼칠 때 큰 자산이 됐다.
1925년 8월에 귀국한 장면은 이후 6년 동안 평양교구에서 봉직했다. 1931년 서울 동성상업학교 서무주임 겸 영어교사로 봉직하다가 1936년에 교장이 됐다. 이후 혜화유치원 원장, 계성소학교 교장 등, 서울 시내 가톨릭계 학교를 두루 도맡았다.
1945년 해방 후 장면은 가톨릭계 대표로 입법의원이 됐고, 1948년 5.10 총선에 출마했다. 종로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입후보해 당선했다. 그해 정부 수립 후 장면은 파리에서 열린 제3차 유엔총회에서 수석대표로 참석해 대한민국 정부 승인을 받아냈다.
1949년 1월 5일, 장면은 이승만 대통령으로부터 주미대사로 임명됐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장 대사는 미국과 유엔에 도움을 청하고자 혼신을 다했다.
장면은 6월 25일(미국시각) 유엔 안보리에 참석해 북한은 즉각 38선 이북으로 철수할 것과 유엔 회원국은 북한에 대해 일체 원조치 않을 것을 결의케 했다. 6월 26일에는 재빨리 미 대통령 트루먼을 만나 미군의 파병을 요청하는 등 유엔의 한국전쟁 참전에 디딤돌 역할을 충실히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