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미 대사 시절의 장면(1950. 6.)
NARA
이 연재명은 '대한민국 대통령 이야기'다. 그렇다면 대통령 이야기만 쓰는 게 마땅해 보인다. 그런데 굳이 장면 국무총리를 넣은 것은 제2공화국 시절이 내각책임제이기 때문이다. 당시 헌법에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는 수반의 위치였고, 국정의 실권과 책임은 국무총리에게 있었다. 그래서 장면 총리를 이 연재에 포함시키는 것이 대한민국 국정 및 현대사 전반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 기자 말
NARA에서 만난 장면
4.19 민주혁명 때 나는 경북 선산군 구미면 소재 구미중학교 3학년생이었다. 당시 친구들 가운데 집안 형편이 다소 나은 이는 대구 시내 고교로 진학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친구들은 아예 고교 진학을 포기하거나 구미농업고등학교에 진학했다.
우리 집은 그 몇 해 전, 아버지가 선산군에서 민주당 후보로 국회의원에 출마해 낙선한 데다가 사업까지 기울자 가계가 몹시 곤란했다. 그래서 나는 고교 진학 준비를 거의 하지 않았다. 당시 구미농업고등학교는 연중 내내 정원 미달로 입시 준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중3 시절을 신나게 놀면서 보내던 가운데 서울에서 지내던 아버지가 그해 늦가을 고향집에 오셨다. 아버지는 장면 총리가 당신 사진 뒷면에다가 '박기홍 동지'라고 사인을 한 걸 할머니께 드렸다. 그런 뒤 할머니를 모시고 서울 명륜동 장면 박사 댁으로 인사 차 가셨다. 그때 장면 만나고 오신 할머니는 '인물도, 인품도 참 좋은 분'이라고 추켜세웠다.
얼마 뒤 아버지는 서울에서 자리 잡을 것이라며 내게 서울 소재 고교 진학을 주선하시면서 입학원서 넉 장을 우편으로 보냈다. 그리하여 나는 졸업식 다음날 네 학교의 입학원서를 한꺼번에 모두 다 쓴 뒤 이불봇짐을 등에 지고 완행열차로 상경했다.
전기 공립고교 입시에서 실력 부족으로 낙방한 뒤, 후기였던 중동고교에 다행히 합격했다. 당시엔 경상도 촌놈의 서울 진학은 드문 일이었다. 입시 문도 좁았다. 아무튼 나의 서울 고교 진학은 그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장면 총리 집권 덕분이었다.
2004년 2월, 내가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에서 한국전쟁 관련 사진을 검색·수집할 때다. 장면 전 총리의 사진이 꽤 많이 나왔다. 영문을 살펴 보니 당시 장면은 주미대사로 한국전쟁 때 유엔 및 미국 트루먼 정부 상대로 종횡무진 외교활동을 펼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NARA 서고에는 그때 활동 사진이 남아 있었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그러자 장면 대사는 이승만 대통령의 훈령으로 유엔 안보리에 참석해 유엔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토록 교섭했다. 또한 미국으로부터 군사와 경제원조를 받는 등 당시 위기에 빠진 대한민국을 구하는 데 일등공신 역할을 했다.
선대의 인연 탓인지, 한국전쟁 당시의 공로 때문인지 나는 NARA 5층 사진 리서치 룸에서 장면 주미대사의 사진을 보이는 대로 모두 수집해왔다. 나는 장면의 사진을 대할 때마다 그의 인생길에 대한 아쉬움을 지울 수 없었다.
그가 정계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더라면 종교인이나 교육자로서 풍랑 없이 살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격동의 세월은 장삼이사도 편히 살지 못하게 한다. 특히 지식인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아마 장면 총리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