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부 학생들과 혁신계 인사들의 시위 플래카드
자료사진
깨끗한 교육자, 근엄한 종교인
이러한 자유의 물결을 틈타 마침내 학생들과 혁신계 일부는 성급한 통일 논의로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와 플래카드까지 등장했다. 그러자 장 정권도 손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이를 규제하는 데모규제법과 반공임시특례법 제정을 하려고 했다. 그러자 야당과 일부 혁신계 인사들이 1961년 3월 22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2대 악법 반대 궐기대회'를 열었다. 이 날 날이 어두워지자 횃불을 든 시위대가 중앙청에서 혜화동까지 누볐다.
다음 날(3월 23일) 청와대회담이 열렸다. 이 자리에는 장면, 윤보선, 민의원 의장 곽상훈, 참의원의장 백낙준 등 4인이 참석했다. 윤보선은 이 자리에서 장면에게 "사태를 수습할 거국내각을 만들라"고 압박했다. 장면은 "좀 더 시간이 필요하다"면서 "내가 그만두면 나보다 더 잘할 사람이 있느냐"라고 반박했다고 전해진다.
그 무렵 세간에는 '3월 위기설' 또는 '4월 위기설'이 파다했다. 장 내각은 이에 대비해 군에 폭동 진압 훈련을 지시했다. 이때 쿠데타를 준비 중이던 박정희는 호시탐탐 폭동이 일어나기를 기다렸다고 한다. 폭동이 일어나면 진압하는 척하면서 반란을 일으킬 계획이었다. 하지만 폭동은 일어나지 않고 3, 4월 위기설을 넘겼다.
1961년 5월 초, 장면은 매우 구체적인 쿠데타 정보를 입수했다. 육군참모총장 장도영에게 쿠데타 설을 제보하면서 조사해보라고 일렀다. 하지만 장도영은 절대 그럴 일은 없을 것이라고 부인하면서 조사조차 하지 않았다. 장면도 미군이 주둔한 상태에서 군의 쿠데타 설은 믿어지지 않아 더 이상 채근치 않았던 실수를 범했다.
그런 가운데 1961년 5월 16일 새벽 반도호텔 809호에 묵고 있던 장면 총리는 장도영 육군참모총장의 다급한 전화를 받았다.
"총리 각하, 육군 30사단 장병들이 장난질 하려는 것을 막았고, 현재 해병대와 공수부대 일부가 서울로 들어오려는 것을 한강 다리에서 막고 있습니다."
"뭐요?"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장면은 후회막심 했지만 이미 쿠데타는 일어났다. 그는 칼멘 수도원에 잠적해 있다가 이틀 후인 5월 18일 내각 총사퇴를 발표한 뒤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비서들이 울부짖으며 말했다.
"이처럼 당해야만 합니까?"
그러자 장면은 부드럽게 한 마디 했다.
"이 사람아, 피를 흘리면서까지 정권을 유지하면 뭘 하겠나?"
묘비명
1966년 6월 4일, 장면은 향년 66세로 영원히 잠들었다. 경기도 포천 천보산 가톨릭공원 묘원에 안장됐다. 다음은 장면 묘비명이다.
"공은 민주정치를 수립하고 경제제일주의를 표방하여 불철주야 심혈을 경주하던 도중, 뜻밖인 5․16 사태로 경륜을 펴지 못한 채 정치에서 물러나 … 깨끗한 교육자요, 근엄한 종교인이요, 불굴의 정치가 생애는 천주의 부름을 받아 하늘 높이 흰 구름을 탔던 것이다. …."
그 나라 지도자는 백성들의 수준과 같다고 했다. 산골 서생이 보기에 장 총리는 이 나라 백성들보다 한 걸음 앞선, 순결한 민주주의 신봉자였다. 그가 시대를 잘못 타고 난 것일까? 시대가 그를 몰라준 것일까?
(*다음 회부터 박정희 대통령 편이 시작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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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사 은퇴 후 강원 산골에서 지내고 있다. 저서; 소설<허형식 장군><전쟁과 사랑> <용서>. 산문 <항일유적답사기><영웅 안중근>, <대한민국 대통령> 사진집<지울 수 없는 이미지><한국전쟁 Ⅱ><일제강점기><개화기와 대한제국><미군정3년사>, 어린이도서 <대한민국의 시작은 임시정부입니다><김구, 독립운동의 끝은 통일><청년 안중근>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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