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역 태극기 집회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일부에서 국부로 추앙하는 이승만 전 대통령이 극우파의 상징물로 떠오르고 있다. 그가 보수파가 아니라 실상은 극우파였다는 사실이 우리 눈 앞에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의석은 단 2석 밖에 없지만, 우리공화당은 대표적인 극우집단이다. 이 극우 정당이 토요일마다 서울역에서 개최하는 태극기집회에는 마치 삼위일체 하나님에게 기도하듯 극우 삼위에게 경례하는 식순이 있다. 그 삼위 중 하나가 바로 이승만이다. 박정희·박근혜 부녀와 더불어 이승만이 토요일마다 서울역 극우 집회에서 경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비슷한 일이 전광훈 목사에 의해서도 벌어지고 있다. 그가 주도하는 극우 집회에서는 광화문광장이 이승만광장으로 불린다. 또 이승만이 기독교 관점에서 이상국가를 세우려 했다면서, 이승만의 기독교 입국론을 예찬하는 발언들이 쏟아진다. 민주공화국 체제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극우파 수령' 이승만의 이미지가 우리공화당과 전광훈 목사에 의해 점점 더 또렷해지고 있는 셈이다.
민주공화국 대통령이었던 이승만, 그러나...
이승만은 외형상으로는 보수파였다. 형식상으로는 민주공화국 대통령이었다. 1948년 7월 17일 제정된 헌법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였다. 그러나 그는 실질적으로 제국의 황제나 다를 바 없었다. 경찰력으로 백성들을 무력 탄압했고,1954년에는 연임 제한을 폐지하는 개헌으로 종신 대통령의 길에 들어섰다.
정치체제를 과거로 되돌리는 그 같은 일은 당시에 보수의 개념에 포함되기 힘들었다. 거족적인 3·1운동에 힘입어 1919년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가 민주공화국을 표방한 사실에서 드러나듯, 1948년 정부수립 훨씬 전부터 한국인들은 민주공화국을 바람직한 정치체제로 인식했다.
일제강점기 때 친일파나 지도층이었다가 해방 뒤 보수파가 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한국민주당(한민당)과 그 계승자인 민주당이 이승만에 맞서 민주공화국 수호를 위한 투쟁을 벌인 사실이 그 점을 보여준다. 그 시대 보수파의 눈에도 이승만은 '옛날 사람'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대한민국은 헌법상으로는 민주공화국이지만, 실질적으로는 전제군주국이었다. 민주공화국으로도 보기 힘들었고, 대한'民'국으로도 보기 힘들었다. 차라리 대한왕국 혹은 대한제국에 가까웠다.
이승만의 의식 또한 민주공화국과 거리가 있었다. 그는 한편으로 구 대한제국 황실을 경멸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황족 의식 혹은 왕족 의식을 숨기지 못했다.
그는 이성계의 후예인 전주 이씨였다. 동생인 충녕대군(세종)한테 세자 자리가 넘어가고 자신은 아버지한테 쫓겨난 양녕대군 이제가 16대조였다. 그는 양녕대군의 서얼 후손이었다. 이런 배경 때문인지 그는 황실에 대한 증오심을 표출했다. 서재필의 정치개혁 운동에 동참한 것이나 고종 폐위 음모에 연루돼 1899년부터 5년간 투옥된 것이 그 예다. 한편, 그는 정반대의 정서도 드러냈다.
"이승만은 조선왕조에 대해서는 강한 반발 의식과 적개심을 가졌지만, 대외적으로는 왕족 의식을 강력하게 표출하는 이중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의식은 유년기부터 지속된 부친으로 인한 보학(족보학)의 영향, 몰락한 방계로 처졌지만 왕손이라는 자긍심에서 비롯된 것으로 볼 수 있다."-정병준, <우남 이승만 연구>
그는 구 대한제국 황족들에 대해 과도한 경계심을 표출했다. 대통령이 된 뒤, 구 황족들의 귀국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들을 잠재적 경쟁자로 인식했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일이다.
1910년 대한제국 황실이 제후급인 이왕가(李王家)로 격하되면서, 황제가 없어지고 이왕(李王)이 자리를 대체했다. 1926년에 초대 이왕인 순종이 세상을 떠나면서, 이복동생 이은(과거의 영친왕)이 이왕 지위를 승계했다. 이은이 지위를 상실한 것은 해방 2년 뒤인 1947년 5월 3일이다. 이날 일본국헌법이 시행되면서 이왕가는 법적 근거를 상실하고 소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