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7월 홍콩에서 찍은 공산당 반대 구호들.
김종성
거기다가 중국공산당의 대륙 석권이 이들에게 상당한 경계심을 줬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 축적한 자신들의 번영이 공산당 체제로부터 어떤 평가를 받게 될지 자명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홍콩에서 중국공산당 반대 구호가 거리에 나붙어도 누구 하나 떼어내지 않는 것만 봐도, 공산당에 대한 홍콩인들의 시각을 가늠할 수 있다.
이렇게 영국보다도 중국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많이 갖고 있다 보니, 한국인들이 일본제국주의에 대해 갖는 분노의 감정을, 홍콩인들은 영국제국주의에 대해 별로 많이 갖고 있지 않다. 물론 그런 정서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들의 평균적 정서에서는 잘 추출되지 않는다. 자기 나라 일부였던 홍콩을 영국에 빼앗긴 중국인들의 입장에서는 쉽사리 동의할 수 없는 지점일 것이다.
홍콩과 중국의 정체성이 충돌하는 지점
그러나 그렇다고 영국 지배 하의 홍콩인들이 중국을 그저 남으로만 대한 것은 아니다. 자신들보다 못 살고 뒤쳐진 중국을 경원시하면서도, 제국주의에 시달리는 중국을 동정하고 동조하는 기류도 분명히 존재했다. 하마시타는 이렇게 말한다. 아래의 '주권'은 '영향력' 정도로 축소 해석해서 읽어야 한다.
"홍콩에서도 지식인들에 의해 중국의 민족주의가 주장되어 왔는데, <순환일보>를 발행한 왕타오와 양무운동을 주장한 허치, 나아가 신해혁명에서 큰 역할을 한 쑨원 등은 홍콩을 거점으로 민족주의를 주장하였다. 이렇듯 홍콩은 영국의 식민지라는 이미지가 전부는 아니며, 오히려 다양한 레벨에서 중국의 주권이 줄곧 행사되었다고 볼 수 있다."
식민지 홍콩 내에 친(親)중국 기운이 상당 수준으로 존재했다는 점은 1967년에 발생한 대규모 시위에서도 확인된다. 영국 식민당국의 일방적 관점에 따라 '67폭동', '홍콩 67좌파 폭란', '홍콩 5월 폭동' 같은 부정적 표현으로 불리는 1967년 시위의 대략적인 모습을, 2018년에 <중소 연구> 제42권 제3호에 실린 이종화 목원대 교수의 논문 '홍콩의 집단 기억과 시위 그리고 정체성 정치'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 시위는 중국대륙에서 발생한 문화대혁명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문화대혁명에 영향을 받은 홍콩의 좌파 노동자들이 홍콩의 조기 해방을 주장하며 폭력과 파괴를 동반한 반영(反英) 폭동을 일으킨 것이다. 홍콩의 홍위병들은 반영제국주의 구호를 외치며 돌·염산·화염병 심지어 사제총과 포탄 등을 만들어 홍콩 경찰을 공격하였고 방화 및 반(反)좌파 언론인에 대한 살해도 자행하였다. 1967년 5월 시작되어 8개월 정도 지속된 폭동 기간 동안 51명이 사망하였고 수많은 사람들이 다치고 투옥되었다."
경찰을 상대로 화살을 쏘는 지금의 시위대보다 훨씬 잘 무장된 세력이 8개월이나 반(反)영국, 친중국 시위를 벌였다. 홍콩 민중의 지지를 어느 정도라도 받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이는 홍콩의 정체성을 친영국적인 데서만 찾을 수 없음을 보여준다. 홍콩은 영국에 호의적인 듯하면서도, 그렇다고 중국에 대한 애착이 없지도 않은 모호한 모습을 보여줬던 것이다. 어느 한쪽에 완전히 치우치지 않는 모습을 보여온 것이다.
하지만, 절대로 모호하지 않은 확실한 한 가지가 있다. 훨씬 더 큰 권력과의 투쟁을 불사하면서라도, 홍콩인들이 자기들만의 정체성을 사수하려 한다는 점이다. 이 점은 1997~2016년 기간에 발생한 6만 4677건(연평균 3200건 이상)의 시위에서 자주 추출된 정서다.
홍콩인들은 중국과 영국, 그 어디에도 속박되지 않는 정체성을 희구하고 있다. 1842년 이후의 177년간 구축해온 그들 나름의 역사를 기초로 '홍콩인의 홍콩'을 구축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중국과 완전히 일체화되기를 꺼리는 것이다. 그게 지난 20여 년간 하루 평균 1건에 약간 못 미치게 빈발하는 시위 문화를 낳았다고 볼 수 있다.
중국 반환 6주년이었던 2003년 7월 1일, 50만여 명의 홍콩 시민들이 국가안전법 제정을 반대하는 시위를 벌였다. 한국의 국가보안법에 상응하는 이 법안은 홍콩 안보가 아닌 중국 안보의 관점에 입각해 있었다.
이 법안은 중국 중앙정부에 유해한 홍콩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하고자 했다. 이 법안에 대한 투쟁은 홍콩이 중국의 여타 지역과 똑같이 취급되는 것에 대한 홍콩인들의 불안감을 반영했다. 결국, 홍콩 당국은 법안을 철회했다.
2007년 7월, 후진타오 국가주석이 홍콩 청소년들에 대한 국민교육 강화를 추진했다. 이 시도 역시 학생·교사·학부모·시민단체의 저항으로 인해 좌절됐다. 자기 아이들의 의식구조가 중국으로 기울지 않을까 우려하는 홍콩인들의 공포심이 낳은 결과였다.
2014년에 행정장관 직선제를 요구하며 일어난 이른바 '노란 우산 운동' 역시 그런 정서를 깔고 있었다. 행정장관 임명에 대한 중국의 입김을 배제하려는 홍콩인들의 열망이 낳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