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에서 연설하는 교황 24일 오전 프란치스코 교황이 원자폭탄이 투하됐던 나가사키에서 반핵 메시지를 발표하고 있다.
연합뉴스
프란치스코 교황이 24일 원자폭탄 투하지인 나가사키와 히로시마를 방문했다. 이곳에서 교황은 "핵무기와 대량파괴무기를 보유하는 것은 평화와 안정을 향한 희망에 대한 해답이 아니다"라며 "무기 제조와 개량은 터무니없는 테러 행위"라고 말했다. 핵무기 보유 자체를 범죄행위로 규정한 것이다.
NPT 체제의 모순
또 핵무기 개발과 보유 등을 금지한 핵무기금지조약(TPNW)의 비준도 촉구했다. 2017년 국제연합에서 체결된 이 조약에는, 공식적 핵보유국인 미국·중국·러시아·프랑스·영국과 비공식적 핵보유국인 북한·인도·파키스탄·이스라엘은 물론이고 한국·일본처럼 외국 핵우산의 보호를 받는 국가들도 참여하지 않았다.
교황은 "핵무기 폐기라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핵보유, 비보유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과 국가, 기관의 참여가 필요하다"고 호소했다. TPNW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들을 겨냥한 발언이다. 방문국인 일본의 아베 신조 정부한테도 메시지를 던지는 발언이다.
NPT로 약칭되는 기존의 핵확산금지조약은 1967년 1월 1일 이전에 핵을 보유한 나라에 대해서는 문제를 삼지 않는다. 미국·중국·러시아·프랑스·영국의 핵보유는 불법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이 같은 불공정 때문에 '공식적 핵보유국'이니 '비공식적 핵보유국'이니 하는 말들이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다. 5개국을 제외한 나머지 나라들은 핵무기를 보유한다 해도 비공식적 핵보유국으로 불릴 수밖에 없다.
이와 달리 핵무기금지조약은 모든 나라의 핵보유를 차별 없이 금지한다. NPT의 P가 확산을 의미하는 proliferation인 데 반해, TPNW의 P는 금지를 의미하는 prohibition이다. 핵무기를 새로 제조하지 못하도록 할 뿐 아니라 기존 핵무기를 폐기할 것도 규정하고 있다. NPT처럼 '언제까지 핵을 보유한 나라는 예외로 한다'는 말도 안 되는 조항은 존재하지 않는다.
2017년 8월 6일 아베 신조 총리는 히로시마 원폭 피해자들을 추모하는 자리에서 "우리들 일본인은 유일한 전쟁 피폭 국민입니다"라고 말했다. 일본이 유일한 원폭 피해국가라는 것은 미국이 유일한 원폭 범죄국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핵을 가장 많이 보유할 뿐 아니라 실제로 핵무기로 범죄까지 저지른 미국의 핵보유는 오늘날 크게 문제되지 않고 있다. 이것이 NPT 체제의 모순이다. 이 모순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 TPNW다.
교황이 NPT가 아닌 TPNW를 지지하고 있다는 점과, TPNW를 외면하는 미군·일본군·중국군·한국군·북한군과 가까운 원폭 투하지 2곳에서 메시지를 발표했다는 점은 상당히 의미 있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의 세계지배에서 핵심적 수단인 핵무기 문제에 대해 교황이 미국과 결이 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다는 것은, 미국 중심의 NPT 체제가 정당하지 않음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교황의 일본 방문은 인류사회에 긍정적인 전망을 선사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번 방문이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도 있다. 교황이 북한 바로 옆에 와 있는데도, 교황의 방문을 바라는 북한의 희망에 대한 긍정적 신호가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난해 10월 9일 김의겸 당시 청와대 대변인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프란치스코 교황을 공식 초청할 뜻을 밝혔다'고 말한 바 있다. 그게 벌써 1년 전 일이다. 할아버지 김일성 때부터 추진해온 교황의 북한 방문 문제는 북미관계의 대전환을 시도하는 김정은에게도 마찬가지로 절실한 사안이다.
오랫동안 적대했던 쿠바와 미국이 프란치스코 교황의 중재에 힘입어 2014년 12월 17일 관계정상화 선언을 한 일이 있기 때문에, 김정은 입장에서는 교황의 방북이 북미관계 전환의 돌파구로 인식될 수도 있다.
하지만, 교황청이 중재에 나설 거라는 표면적 징후가 아직 드러나지 않고 있다. 지난해 10월 18일 문재인 대통령을 통해 김정은의 뜻을 전해들은 교황이 "초청장이 오면 방문하겠다"고 말했지만, 아직까지 가시적 성과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번 일본 방문을 앞두고도 청와대가 교황-김정은의 비무장지대(DMZ) 회동을 제안했지만, 이에 대해서도 이렇다 할 반응이 없다.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점이 있다. 쿠바-미국 사례에서 나타난 것처럼, 교황이 적대국가 간의 수교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열매가 거의 무르익는 시점이라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북미관계 같은 민감한 사안에 개입했다가 성과를 내지 못하게 되면 위신에 영향을 받을 수 있으므로 교황청으로서는 개입 시점에 신경을 쓰지 않을 수밖에 없다.
쿠바-미국 사례와 더불어 교황청이 이와 관련해 참고할 만한 또 다른 사례는 베트남-미국 사례다. 베트남 및 쿠바와의 수교를 결정할 때 미국 행정부를 움직인 결정적 원동력 중 하나는 미국 기업들의 태도였다. 베트남 및 쿠바 시장 진출을 희망하는 미국 기업들의 움직임이 백악관의 판단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런데 북미관계에서는 그런 현상이 아직 나타나지 않고 있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이따금 북한 시장의 잠재력을 극찬하지만, 미국 재계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 교황청이 이런 점에 주목하고 있을 수도 있다. 북미수교라는 열매가 아직 떨어질 때가 되지 않았다고 판단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 한국을 서글프게 하는 게 있다. 미국 기업들이 북한 진출을 서두르지 못하는 결정적 이유는 한반도 정세의 불안정에 있다. 그런데 이 같은 불안정이 미국 군수기업들한테는 유리하다. 한반도 불안정 덕분에 미국 군산복합체는 한국을 '단골 고객'으로 만들어둘 수 있었다.
군수업체가 아닌 일반적인 미국 기업들로서는 자국 군산복합체에 의해 끊임없이 조장되는 한반도 불안정 때문에라도 북한 진출 문제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 없다. 트럼프의 리더십 문제 때문이기도 하지만, 미국 군산복합체의 이해관계가 북미관계 진전을 가로막고 있어 교황청이 쉽사리 중재에 나서지 못할 수도 있다. 교황의 일본 방문이 그 같은 한반도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만든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시민사회에 힘을 준 교황의 메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