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연재의 다른 글 광주시 외곽으로 철수한 계엄군은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며 살의를 감추지 않았다. 평소 주입된 광기였는지, 보복감정이었는지는 헤아리기 어렵지만, 멱감는 아이들에게까지 마구 총질을 해댔다. 이들의 외곽지구 봉쇄 임무였다. 도청에서 철수한 공수부대는 22일부터 외곽지구 봉쇄임무를 맡았다가, 24일에 철수명령을 받고 20사단에게 외곽지구 봉쇄임무를 인계한 후 광주비행장으로 철수하였다. 공수부대는 지원동 주남마을을 출발하여 학동과 진월동을 거쳐 시민들의 눈에 띄지 않는 야산으로 철수하던 중 진월동에 이르러서 인근지역에 장난삼아 총질을 가했다. 큰사진보기 ▲광주광역시 동구 주남마을에 있는 위령비. 1980년 5월 23일 11공수부대는 부상당한 청년 두 명을 주남마을 야산 중턱으로 끌고가 사살하고 암매장했다.이주빈 저수지에서 멱감고 있던 아이들에게 집중사격을 가하자 아이들은 둑 너머로 피신했지만, 전남중학교 1학년생이었던 권근림이 머리에 총을 맞고 즉사했다. 또한 진월동 동산에서 놀고 있던 아이들에게도 무차별 집중사격을 가했다. 모두 피신했지만 신발이 벗겨져 뒤돌아섰던 효덕국민학교 4학년 전재수는 총에 맞고 즉사하였다. 공수부대는 가축들에게도 총질을 하여 철수중 인근 마을의 가축들을 닥치는 대로 죽였다. 이에 충격을 받은 한선웅은 정신분열 증세를 보이다가 결국 병세가 악화되어 사망했다. (주석 6) 계엄군은 광주외곽에서 갖가지 만행을 서슴지 않았다. 불안을 느낀 시민들이 탈출하려다 붙잡혀 살해당하거나 총검에 찔린 사례가 수없이 많았다. 계엄군은 그야말로 닥치는대로 보이는대로 총을 쏘거나 칼로 찔렀다. ▲1980년 5월 광주민중항쟁 당시 주먹밥을 만들고 있는 대인시장의 아짐들 5.18 기념재단 시외곽에서 이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을 즈음 시내는 비교적 평온한 가운데 질서가 유지되고 대책위원회가 개편되는가 하면 시민자치운동이 전개되었다. "이날 오전 일반 수습대책위는 당초 15명에서 5명이 사퇴, 10명만 남았는데 여기에 학생수습위를 통합, 총 30여 명의 확대수습위원회(일반 수습위 10명, 전남대생 10명, 조선대생 10명)를 구성하였다. 위원장에는 윤공희 대주교가 추대되었으며, 일반 수습위원으로는 조비오 신부, 신승규 목사, 박영봉 목사, 박윤봉 적십자사전남지사장, 독립투사 최한영 옹, 변호사 이종기, 태평극장 사장 장휴동, 교사 신영순 씨 등이 위촉되었다." (주석 7) 큰사진보기 ▲1980년 5월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 집결한 광주시민들. 이날 시민들이 목이 터져라 부른 애국가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순간 국가는 그 국민을 죽였다. 국가의 존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5.18 기념재단 새 확대 수습위원회가 구성되는 것을 전후하여 광주시내 곳곳에서 시민자치운동이 벌어지고, 계엄군이 자행한 참혹한 시체들이 속속 드러나 시민들을 전율케 하였다. 몇천 원 혹은 1만 원 정도씩의 돈을 거둬 10여 명의 동네 아주머니들이 '흥운식당' 안집에 모여 김밥을 말았다. 우리는 11시 30분 쯤 시외버스 공용터미널에 있던 시위대들에게 김밥과 음료수를 갖다주었다. 시위대원들의 옷에 피가 묻어 있기도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 "고맙다"고 하면서 먹었다. (구술 : 이서운) (주석 8) 도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23일 오후부터 매일 오후 2시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를 열었다. 노동자ㆍ시민ㆍ학생ㆍ가정주부 등 각계각층 사람들이 분수대 위로 올라가 계엄군의 만행을 성토하고 앞으로의 수습대책을 토론했다. 또한 그때 파악된 피해상황이 보고되었으며 장례준비를 위한 모금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주석 9) 큰사진보기 ▲5.18 희생자들이 상무관에 임시 안치되기 전 도청 앞 광장에서 노제를 지내고 있다. 5.18 기념재단 그간 숨겨졌던 끔찍한 사건들이 퍼져나와 시민들을 다시 한번 경악케 하는 경우도 적잖았다. 3일 오전 11시 광주세무서 지하실에 시체 1구가 있다는 보고에 접한 시민군 측에선 현지에 나가 시체를 직접 확인했는데, 이 시신은 "유방과 음부가 도려져서 있었고 얼굴이 대검에 난자당한 여고생"이었다. 교복 속에서 나온 학생증에서 이 시신의 주인공은 전남여고 2학년 이모양으로 확인되었으며, 적힌 주소대로 부모를 찾아 시체를 인도하자 이들은 울지도 못하고 그만 실신, 까무라치더라는 것이다. (주석 10) ▲도청앞 상무관에 안치된 열사들의 주검5.18 기념재단 도청에 안치되어 있는 사망자를 확인하려는 사람들에게 한 사람씩 신분증을 대조한 후 시신을 보여줬다. 대부분의 시신은 형상을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심하게 훼손돼 있었다. 총상을 입거나 곤봉에 맞아 사망한 시신은 머리와 얼굴이 짓뭉개졌고, 대검으로 난자된 시체는 붓거나 부패했다. 팔이 떨어져 관속에 따로 놓여 있거나, 목이 잘려서 몸과 분리된 사체, 얼굴이 검푸르게 변색되고 눈알이 튀어나온 시체 등 비참하기 이를 데 없는 모습들을 본 유족들은 손수건을 입에다 대고 터져나오는 오열을 억누르거나 관을 붙들고 미친 듯이 통곡하다가 탈진하여 쓰러졌다. 일단 가족이 확인한 시신은 상무관에 옮겨 안치되었다. (주석 11) 도청을 가로질러 체육관 안에는 61개의 관이 줄지어 있었다. 시위 초반에 희생당한 이들의 시신은 친인척에 의해 이미 신원이 확인되었다. 관에 놓인 사진들은 많은 젊은이의 얼굴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중년 여인과 7살 먹은 아이의 모습도 있었다. 광주시민들은 100개의 신원을 알 수 없는 시체가 도청 안에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군인들은 기자들이 도청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막았다. (주석 12) 다음 줄에는 여학생들이 모여 있었는데 춘태여자상업고등학교 학생들이었다. 그들은 아직도 왜 자신들의 급우 한 명이 죽어 자신들 앞에 누워 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표정들이었다. 여학생들은 쏟아지는 눈물에 목이 메인 채 이별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중 한 여학생이 몸을 돌려 제단을 향해 애절한 목소리로 호소했다. "친구의 죽음을 헛되이게 말아주세요!" 그녀는 열 일곱 살 먹은 박금희라는 여학생이었다. 그녀의 말이 끝나자 상무관을 가득 메운 모든 시민들은 애국가를 합창하고 만세를 불렀다. "대한민국 만세! 민주주의 만세!" (주석 13) ▲헌혈을 위해 병원에 몰려든 시민들과 의료진 5.18 기념재단 헌혈 희망자는 이곳만이 아니었다. 각 병원마다 장사진을 이루었다. 특히 황금동에 있는 조그마한 술집에 있는 아가씨들이 너도 나도 병원으로 찾아와 싸우다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해 자진해서 헌혈하겠다고 나섰다. "내 피부텀 빼 줏쇼." "아니 아니 내 피 많이 빼도 좋아라우." "우리가 술파는 여자라고 어디 마음까지 나쁜 줄 알아요. 우리 마음도 나라 위해서는 똑같어라우." 30여 명이 줄을 지어 서있는 전남의대 부속병원 헌혈실은 이 아가씨들로 꽉 차 있었다. 이같은 헌혈희망자는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된 전날인 26일까지 줄을 이었다. (주석 14) 주석 6> 강준만, 앞의 책, 147쪽. 7> 윤재걸, 앞의 책, 120~121쪽. 8> 『광주5월항쟁전집』, 91쪽. 9> 앞과 같음. 10> 윤재걸, 앞의 책, 118쪽. 11> 황석영 외, 앞의 책, 307쪽. 12> 샘 제임스(1980년 AP통신 기자), 「항쟁지도부 벽에 새겨진 '세계평화'」, 『5ㆍ18 특파원 리포트』, 117쪽. 13> 게브하르트 힐셔(남독일신문 극동특파원, 5ㆍ18현장취재), 「목가적 전원도시에서 떨쳐진 악몽」, 앞의 책, 85~86쪽. 14> 김영택, 앞의 책, 134쪽. 덧붙이는 글 [김삼웅의 ‘5ㆍ18광주혈사’]는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 #5ㆍ18광주혈사 #5.18광주민주화운동40주년 #상무관 #주남마을학살 #광주민중항쟁 추천11 댓글 스크랩 페이스북 트위터 공유0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네이버 채널구독다음 채널구독 10만인클럽 10만인클럽 회원 김삼웅 (solwar) 내방 구독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이 기자의 최신기사 26세, 가족과 함께 만주 망명 구독하기 연재 5ㆍ18광주혈사 다음글42화시민들의 격문과 계엄사의 경고문 현재글41화참혹한 시신들, 헌혈행렬 줄 잇고 이전글40화"말하지 말지어다 이 투쟁이 전혀 무익하다고" 추천 연재 이태원 참사 생존자의 이야기 "사과하기 위해 왔습니다" 그날 서점은 눈물바다가 됐다 여주양평 문화예술인들의 삶 "마지막 대사 외치자 모든 관객이 손 내밀어... 뭉클" 전강수의 경세제민 이러다가 대한민국이 세계지도에서 사라질지도 모른다 윤석열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박근혜 탄핵 때와 유사...지역에서 벌어지는 일들 SNS 인기콘텐츠 [이충재 칼럼] '김건희 나라'의 아부꾼들 "끝내자 윤건희, 용산방송 거부" 울먹인 KBS 직원들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이창수 "김건희 주가조작 영장 청구 없었다"...거짓말 들통 '나체 시위' 여성들, '똥물' 부은 남자들 영상뉴스 전체보기 추천 영상뉴스 "한달이면 하야" 언급한 명태균에 민주당 "탄핵 폭탄 터졌다" 이창수 "김건희 주가조작 영장 청구 없었다"...거짓말 들통 용산 '친오빠 해명'에 야권 "친오빠면 더 치명적 국정농단" AD AD AD 인기기사 1 어린이집 보냈을 뿐인데... 이런 일 할 줄은 몰랐습니다 2 "한 번 씻자고 몇 시간을..." 목욕탕이 사라지고 있다 3 "2천만원 깎아줘도..." 아우디의 눈물, 파산위기로 내몰리는 딜러사와 떠나는 직원들 4 한강 작가를 두고 일어나는 얼굴 화끈거리는 소동 5 49명의 남성에게 아내 성폭행 사주한 남편 Please activate JavaScript for write a comment in LiveRe. 공유하기 닫기 참혹한 시신들, 헌혈행렬 줄 잇고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밴드 메일 URL복사 닫기 닫기 기사를 스크랩했습니다.스크랩 페이지로 이동 하시겠습니까? 취소 확인 숨기기 이 연재의 다른 글 43화사실 보도에 역점 둔 주요 외신들 보도와 달랐던 국내 언론들 42화시민들의 격문과 계엄사의 경고문 41화참혹한 시신들, 헌혈행렬 줄 잇고 40화"말하지 말지어다 이 투쟁이 전혀 무익하다고" 39화전두환, 언론사 경영진 불러 협박공갈 맨위로 연도별 콘텐츠 보기 ohmynews 닫기 검색어 입력폼 검색 삭제 로그인 하기 (로그인 후, 내방을 이용하세요) 전체기사 HOT인기기사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미디어 민족·국제 사는이야기 여행 책동네 특별면 만평·만화 카드뉴스 그래픽뉴스 뉴스지도 영상뉴스 광주전라 대전충청 부산경남 대구경북 인천경기 생나무 페이스북오마이뉴스페이스북 페이스북피클페이스북 시리즈 논쟁 오마이팩트 그룹 지역뉴스펼치기 광주전라 대전충청 부산경남 강원제주 대구경북 인천경기 서울 오마이포토펼치기 뉴스갤러리 스타갤러리 전체갤러리 페이스북오마이포토페이스북 트위터오마이포토트위터 오마이TV펼치기 전체영상 프로그램 쏙쏙뉴스 영상뉴스 오마이TV 유튜브 페이스북오마이TV페이스북 트위터오마이TV트위터 오마이스타펼치기 스페셜 갤러리 스포츠 전체기사 페이스북오마이스타페이스북 트위터오마이스타트위터 카카오스토리오마이스타카카오스토리 10만인클럽펼치기 후원/증액하기 리포트 특강 열린편집국 페이스북10만인클럽페이스북 트위터10만인클럽트위터 오마이뉴스앱오마이뉴스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