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8민주화운동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1980년 5월 28일 광주민주화운동을 진압한 계엄군 탱크들이 도로에 세워져 있다.
연합뉴스
광주시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신군부의 움직임도 빨라졌다. 정호용이 강경론을 주도했다. 이후 계엄군의 '인간사냥'이 더욱 심해졌다.
정호용 공수특전사령관은 광주 일원의 사태가 격렬해져 심각하다는 제7여단장 신우식 준장으로부터 현지보고를 듣고, 제3공수 특전여단(여단장 최세창 준장)에게 광주지역에 계엄군을 출동시킬지 모르는 형편이니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대기하라는 지시를 하고 C-54 특별기를 타고 광주로 향했다. (특전사령관 정호용 소장은 육사 동기인 노태우 장군과 함께 각각 제7공수, 제9공수 특전여단의 창설여단장으로 2년 반 동안 재임하고, 그 다음에 특전사령부 참모장으로 약 1년여간 근무함. 정호용 사령관이 제7여단의 여단장으로 있을 때, 같은 육사 동기인 전두환 장군은 최전방의 수도방어부대인 제1사단의 사단장이었다.)
광주에 도착한 정호용 사령관은 제7여단장 신우식 준장으로부터 지금까지의 광주 일원의 사태에 관한 보고를 받은 다음 곧장 육군 전투병과교육사령관(전교사) 윤흥정 장군과 부사령관 김기석 장군을 만나 대책을 논의했다. (윤흥정 장군은 정호용 장군의 육사 선배로 평소 친분이 두터운 사이). 윤흥정 장군이 정호용 장군에게,
"이거 양상이 대단히 틀리게 돌아가는군."
정호용 장군이 윤흥정 장군에게
"중앙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만 계엄확대 조치에도 이렇게 소요가 계속된다면 가만있을 수 없지 않습니까? 차라리 계엄군의 확고한 의지를 보여줌으로써 초기에 군중들의 심리를 가라앉혀야 옳지 않겠습니까?"
정호용 장군이 다시 진언,
"그런데 광주시내의 기관장들이 대책을 협의하는데 그걸 보니까 이번 광주 시민이나 학생들의 데모가 오히려 정당한 것인 양 분위기가 돌아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정호용 사령관은 광주 현지의 모든 상황을 점검하고 다시 서울로 돌아갔다. (주석 8)
주석
7> 정상용 외, 앞의 책, 200쪽.
8> 『월간 말』, 1989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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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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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부터 끝까지 강경진압론자였던 정호용이 강경론 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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