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18 기간 중 열흘 동안 나오지 못한 <전남매일신문>은 6월 2일 발행 재개를 앞두고 있었다. 사진은 6월 2일자 <전남매일신문> 대장(최종판 이전 검토·편집을 위해 만든 원장부)이다. 계엄사령부가 검열한 '빨간펜' 흔적이 곳곳에 남아 있다. 이날 실릴 예정이던 김준태 시인의 109행짜리 시 <아아, 광주여 우리나라의 십자가여!>는 33행으로 짤려 인쇄됐다.
소중한
시민들이 분노한 것은 공수부대 학살범들과 그 배후들 뿐만이 아니었다.
무고한 국민들이 군인들에 의해 무수히 학살되고 있는데도 이를 보도하지 않는 언론기관에 대해 분노가 표출되었다.
지역 신문인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5월 20일 사장에게 절필을 선언했다.
우리는 보았다.
사람이 개 끌리듯 끌려가 죽어가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러나 신문에는 단 한 줄도 싣지 못했다.
이에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 (주석 9)
시민들은 방송사로 몰려갔다. 모든 TV방송과 라디오는 사람들이 현장에서 맞아죽고 개처럼 끌려가는 데도 한마디 보도는커녕 연일 군사반란자들의 철면피한 얼굴을 뉴스 속보로 보도하고 각종 예능프로를 내보내고 있었다.
저녁 7시 40분경부터 약 50분가량 도청 앞 금남로에서는 격렬한 충돌 이후의 소강상태가 이어졌다. 시위 군중은 금남로 4가 국민은행 앞까지 밀려갔다. 금남로에서 빠져나온 시위대는 제봉로와 충장로 쪽으로 밀려들었다.
계엄군의 완강한 저지에 정면 공격이 불리하다고 여긴 시민들은 제봉로에 위치한 MBC 방송국으로 향했다.
저녁 7시 45분경 MBC를 둘러싼 시위 군중 5천여 명은 저녁 '8시뉴스' 시간에 광주 상황에 대해서 "사실 그대로 지금 밖에서 진행되는 모든 참상을 보도할 것"을 거세게 요구했다.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8시 30분경 방송국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다. MBC 직원들과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경계 병력이 달려들어 소화기로 불을 껐다. 이때는 불이 더 이상 번지지 않았다.
같은 시각 광주역 부근에 있는 KBS 방송국도 시위대에 의해 점거되었다. 성난 군중에 의해 방송기자재가 파손되는 바람에 방송이 완전 중단되었다. (주석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