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 당시 계엄군에 봉쇄된 광주-송정리 간 도로.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박정희 정권기에 광주ㆍ전남의 민주화운동은 치열했다.
홍남순 변호사를 중심으로 하는 재야그룹과 조아라 YWCA 명예회장ㆍ윤한봉 그룹의 종교단체와 사회단체그룹, 엠네스티 중심의 교사그룹, 장두석ㆍ황일봉 등 양서조합, 김민기 등 노래운동팀, 야학운동팀, 노동자 그룹 등 다양한 모임의 형태로 전개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5ㆍ17 계엄확대 조치와 동시에 체포되거나, 간신히 구속을 면한 이들은 피신하여, 5ㆍ18항쟁 초기에는 시위를 이끌 리더그룹이 존재하지 않았다. 광주학생들이 궐기하고 시민들이 일어서고 있다는 소식을 들은 홍남순과 윤한봉이 20일 각각 광주로 돌아오면서 지도부가 차츰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78년 전남대 우리의 교육지표 사건으로 투옥됐다 80년에 다시 복적한 전남대 김윤기ㆍ김선출과 김태종 등은 같은 고교 동기생들로 문화패 광대 활동을 했던 경험으로 문화선전대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자는 데 의견일치를 본다.
이들은 시민들에게 우선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서 18일 오후 전남대 탈춤반인 전용화와 합류해 유인물 등사에 필요한 가리방, 등사기를 갖춰 곧바로 유인물 작성ㆍ배포작업에 들어간다.
이들은 16절지 5백여 장의 유인물을 만들어 변두리지역인 산수동, 계림동 일대에 뿌린다. 내용은 "전두환의 마각이 드러나기 시작했으니 광주시민은 총궐기하자"는 것이다. 김선출(당시 전남대 복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우리는 2개조로 나눠 공용터미널, 증훙동 부근과 산수동, 계림 등 일대에 유인물을 만들어 뿌렸다"고 회고한다. (주석 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