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 사진은 1980년 3월 11일 오후 박정희 전 대통령 시해 사건 관련 구형 공판에서 검찰관의 논고가 계속되는 동안 이마의 땀을 닦으며 경청하는 정승화 전 육군참모총장의 모습.
연합뉴스
군권을 장악한 전두환 세력은 거칠 것이 없었다.
1980년 5월 17일 저녁 9시경 중앙청 국무회의실에는 비상국무회의 소집 연락을 받은 국무위원들이 모여들었다. 그들은 무엇 때문에 늦은 저녁에 갑자기 국무회의가 소집되는지, 무슨 안건을 심의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회의에 참석했다.
이날 저녁 광화문 중앙청 일대에는 전에 없이 무장군인들의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고, 국무회의실 복도 양편에 착검한 소총을 든 살벌한 군인들이 공포분위기를 조성하고 있었다. 국무위원들은 외부와 자유롭게 전화통화 조차 할수 없었다.
신현확 총리는 9시 42분에 제42회 임시국무회의 개회를 선언하고 국방부에서 '의안 360호'로 제출한 비상계엄 전국 확대선포안을 의안으로 상정하여 의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김옥길 문교장관이 의안에 대한 설명을 요구했지만 찬반토론은 전혀 없었다. 신 총리가 이 의안의 가결과 국무회의의 산회를 선언했을 때의 시간은 9시 50분이었다. 일체의 찬반토론도 없이 단 8분 만에 비상계엄 전국 확대선포안이 의결된 것이다. 실로 최규하 정부는 신군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이렇게 토론 한마디 없이, 헌법기구인 국회를 쓸어버리고 민주화를 짓밟는, 그리하여 5ㆍ17쿠데타를 뒷받침하는 계엄포고령이 국무회의에서 어이없게도 처리된 것이다. 신군부의 이른바 '싹쓸이 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임시국무회의가 계엄포고령을 의결한 것은 요식절차에 불과하고, 이보다 앞서 이날 오전 11시부터 전군 주요 지휘관회의가 소집되었다. 전군 지휘관회의는 최성택 합참정보국장의 정세보고와 현황설명 후 자유토론 형식으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