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탈긴 직함을 가지고 살아있는 임금을 뒤에 둔 채 전권을 휘두르는 수양과 살아있는 대통령을 뒤에 두고 긴 직함으로 전권을 휘두르던 국보위상임위원장은 너무나 닮았다. 앞이 전두환 뒤가 최규하 대통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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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7일 새벽, 헌법(당시) 제48조의 규정에 따라 대통령 권한대행이 된 최규하는 정치적 야심이나 정치세력이 전혀 없는 직업외교관 출신이라는 것이 장점이 되어 1975년 국무총리에 기용된 인물이다.
최규하는 27일 새벽 4시를 기해 전국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대통령 권한대행에 취임하여 '대권'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의 취임으로 우리나라는 4ㆍ19 후 꼭 20년 만에 또 한 차례의 '과도정부'를 맞게되었다.
최규하는 12월 6일 통일주체국민회의 제3차 회의에서 단독 입후보하여 제10대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최 대통령의 임기는 당선 즉시 개시되어 박정희 대통령의 잔여임기인 1984년 12월 26일까지 재임할 수 있으나 12월 10일 특별담화를 발표, 잔여임기를 다 채우지 않고 가능한 빠른 기간 내에 헌법을 개정하고 11대 대통령 및 국회의원 총선을 실시, 정권을 이양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최규하체제는 순탄하지 않았다.
대통령에 당선된 지 1주일도 안돼 전두환이 주도한 12ㆍ12사건이 발생했고, 권력의 기반이 없는 그에게 공화당이나 유정희는 이미 정치적 기능이 상실된 불임정당일 뿐이었으며, 신민당은 마치 새 집권당이나 되는 듯이 꿈에 부풀어 있었다.
이런 정치적인 상황에 선 최규하는 12월 21일 제1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취임사를 통해 "앞으로 1년 정도면 국민의 대다수가 찬성할 수 있는 내용이 담긴 헌법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라고 과도정부의 기간을 1년으로 늘려잡았다. 최 대통령의 이 같은 발언은 '3김'을 비롯 여야 정당과 재야인사들의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최규하는 대통령 취임과 더불어 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했다.
재야세력과 일부 정치인들은 1979년 11월 24일 명동 YWCA에서 '통일주체대의원에 의한 대통령 선출저지를 위한 국민대회'를 열어 최규하의 대통령 선출을 반대했으며, 신민당도 과도정부의 정치일정에 심히 반발하고 나섰다. 권력욕이 발동된 것인지 과도정부는 정부주도의 개헌안을 마련한다는 방침을 세워 국회헌법개정특별위원회와 마찰을 빚기도 했다.
자체적인 정치기반이 없이 신군부의 등에 업힌 꼴인 최규하 정권은 민주화를 바라는 국민의 염원을 제대로 수용할 수가 없었다. 학생ㆍ노동자ㆍ재야인사들은 정치일정의 단축과 유신잔재 청산을 요구하며 대대적인 시위를 벌였고, 김대중ㆍ김영삼ㆍ김종필로 대표되는 정치집단에서는 각기 이해가 엇갈린 상태에서 마찰을 빚어 정국은 혼미 상태에 빠져들었다.
여기에다 신현확 총리의 2원집정부제 발언과 출처불명의 구여권 신당설이 나돌고, 5월 15일의 서울역 앞의 대규모 시위와 사북사태까지 겹쳐 위기설이 증폭되어갔다.
전두환 신군부의 시나리오에 따라 최 대통령은 5월 18일 '5ㆍ17계엄확대조치'와 관련, 대통령 특별성명을 통해 "최근의 학원소요로 야기된 혼란상태가 더 이상 계속되면 국기를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할 우려가 있어" 계엄확대조치를 취한다고 발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