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1978년 박정희 대통령의 정부 청사 연두 순시를 수행하고 있는 차지철 경호실장. 두 사람 사이로 당시 노태우 청와대 경호실 작전차장보 모습이 보인다.
동아일보
그러나 대법원의 심리과정 중 형사 3부의 양병호ㆍ서윤홍 판사가 '내란목적 살인죄'에 반대의견을 냈고 최종판결 때도 민운기 판사 등 6명의 판사가 김재규에게 내란죄 불성립 의견을 냈다. 이들은 5ㆍ17 전두환 쿠데타 후 모두 강제 사직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10ㆍ26 사건은 이후 박정희에 의해 사육된 정치군인들과 그 아류들의 집권으로 엄정한 재평가 작업을 거치지 못한 채 '국부'와 '시해범'으로 자리매김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박정희는 18년 동안 헌정질서를 유린하며 민주주의를 짓밟고 인권을 탄압하면서 지역차별과 극단적인 냉전논리로 민족분열책을 추구했다. 그의 '업적'으로 치는 경제건설의 논리는 부분적으로 긍정의 측면도 없지 않지만, 같은 시기 대만ㆍ싱가포르ㆍ홍콩 등 '아시아 4룡'과 스페인, 이탈리아 등 발전상과 비교할 때 박정희가 독점할 품목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경제성장은 해방 후 교육받은 한글세대의 성장으로 대량의 우수한 산업예비군이 진출하고, 지극히 굴욕외교의 결과 식민지배 35년의 죄값으로 일본으로부터 무상 3억 달러, 유상 2억 달러가 유입되고, 베트남전에서 5,000여 명의 희생의 댓가를 치르면서 10억 달러 정도가 들어왔다.
또 농민들의 저곡가, 노동자들의 저임금 등의 희생과 국제유가가 60년대 내내 1배럴에 1달러의 헐값이 유지되었다. 경제성장은 이 같은 요인에 의한 종합적인 성과였다.
얼마 전 김재규 재판을 담당했던 양병호 전 대법원 판사가 "민주주의의 회복을 위해 저격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을 뒤집을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10ㆍ26사건에 대한 평가를 내린 바 있다.
김재규는 처형 직전에 유언으로 자신의 무덤 앞에 "의사 김재규 장군지묘"라고 써주기를 원했다. 신군부세력은 이것마저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망 몇 해 후 광주ㆍ전남 송죽회가 세운 비석 뒷면에는 다음과 같은 추모시가 새겨졌다.
먹구름이 하늘을 덮고 광풍 몰아 덮칠 때
홀로 한 줄기 정기를 뿜어 어두운 천지를 밝혔건만
눈부신 저 햇살을 다시 맞지 못하고
슬퍼라 만 사람 가슴을 찢는구나
아! 회천의 그 기상 칠색 무지개 되어 이 땅 위에 길이 이어지리.
"박정희라는 인물은 우리나라 역사상 세종대왕과 이충무공을 합해놓은 인물로 후세의 사람들은 반드시 평가할 것이다."
이것은 『위인 박정희』란 책에 나온 수사이고, 박근혜 집권 시기 이른바 뉴라이트계열의 역사관이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그의 덕택으로 감투를 쓰고 돈을 벌어 영화를 누렸으므로 그에 대해서 이런 극단적인 평가도 가능할 수 있을 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