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사 생도 시절의 전두환(왼쪽)과 노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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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성회는 육사 11기의 전두환(용성), 노태우(관성), 김복동(여성), 박승하(웅성), 최성택(혜성)이 모여 만든 동향 출신 모임으로 진해 육사시절 유달리 응집력이 눈에 띄는 모임인데, 이들이 졸업 후 위관으로 근무하던 시절, 교유관계를 늘려 11기의 또 다른 영남 출신 손영길, 권익현, 정호용 등이 가세해 칠성회를 구성한다. (오성회의 박승하가 같이 졸업을 못해 탈락하고 3명이 가세해 7명이 된 것임)
이들은 61년 5ㆍ16 이후 줄곧 정국의 추이를 예의주시하면서 군사정권에서 일정 역할을 확보하기 위한 서클을 조직하기로 의견을 모은다.
급기야 63년 2월, 전두환(당시 소령)의 집에서 칠성회 멤버에 박갑용(대령 예편ㆍ전 수경사 30대대장). 남중수(대령 예편ㆍ전 에너지관리공단 감사), 노정기(소장 예편ㆍ전 필리핀 대사) 등 3명을 추가, 10명으로 하나회를 조직하기에 이른다.
하나회의 첫 번째 세력화는 63년 3월 18일, 육사 총동창회 모임인 북극성회 운영위원회에서 11기 운영위원인 노정기의 강력한 추천 발의로 노태우(당시 대위)가 북극성 회장에 선출되는 것으로 시작된다.
하나회는 63년 7월 6일 4대의혹 사건으로 육사 8기 그룹의 김종필계가 궁지에 몰리고 육사 5기의 김재춘(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부상하자 육사 총동창회의 이름을 빌려 육사 8기를 거세하려는 친위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북극성회 운영위원회의 반대에 부딪쳐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소위 7ㆍ6사건이다.
그러나 이 사건을 계기로 하나회는 육사 출신 장교들 사이에 노출된다. 그러니까 하나회의 존재가 최초로 알려진 것이 지금부터 30년 전의 일이다. 아이러니컬하게도 당시 방첩대장이 정승화(12ㆍ12 당시 육군참모총장ㆍ계엄사령관)다. (주석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