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용운이 살았던 심우장에서 찍은 사진. 심우장은 서울 성북구 성북동에 있다.
김종성
때는 1906년, 그의 나이 27세였다. 배 타러 원산 가던 그는 우연히 만난 두 명의 승려와 동행하게 됐다. 이들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한 그는 그곳 한인촌을 찾아갔다.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길거리에서 그는 이상한 기운을 감지했다. 드문드문 눈에 띄이는 한국인들이 그의 일행을 쳐다보며 수군대는 모습이 자꾸 발견됐던 것이다. 여관에 들어갈 때도 마찬가지였다.
불길한 예감은 결국 현실이 되고 말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휴식을 취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느닷없이 봉변을 당하고 말았다. 동포 청장년 10여 명이 신발도 벗지 않고 무기를 손에 든 채 스님들의 방에 난입한 것이다.
무장한 한국인들이 그 방에 침입한 이유는 1935년 3월 8일부터 13일까지 그가 <조선일보>에 기고한 '북대륙의 하룻밤'이란 회고담에서 찾을 수 있다. 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이 쓴 <만해 한용운 평전>의 부록에 실린 이 회고담은 아래와 같다. 어조사 몇 개를 알기 쉽게 바꾸었다.
그 찰나 나는 그들에게 변명을 하되 기축(氣縮, 기가 질림)하지 않는 것이 요체라고 생각하였으므로, 그들을 본체만체하고 다리를 접개인 채로 턱을 괴고 앉았다.
그들 중의 장년 한 사람이 나의 앞에 쪼그리고 앉더니
"너희는 다 무엇이냐?"
하고 눈을 부라리면서 묻는다.
"우리는 중이요" 하고 나는 괴었던 턱을 떼고 말하였다.
"중은 무슨 중이야. 일진회원이지?"
"아니오. 우리의 의관이라든지 행장을 보아도 알 것입니다."
"정탐하기 위하여 변장을 하고 온 것이지. 그러면 우리가 모를 줄 아나?"
"아닙니다. 본국 사원(寺院)으로 조사를 해도 알 것이오."
결국 한용운은 현지인들의 오해를 푸는 데 성공했다. 처음에 현지인들은 한용운 일행을 친일단체인 일진회 회원들로 착각했다. 그래서 다짜고짜 죽여 없애려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건을 계기로 한용운의 세계일주 계획은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그는 발길을 돌려 한국으로 돌아왔다. 만약 그가 그런 변을 당하지 않고 무사히 세계일주를 마쳤다면, 오늘날 우리는 전혀 색다른 한용운의 시 세계를 경험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유라시아대륙을 횡단하고 대서양을 횡단해 미국까지 둘러봤다면, 그의 시 세계는 훨씬 더 풍요로워졌을지도 모른다.
한용운의 세계일주 계획을 망가트리고 한국 문학의 발전을 저해한 일진회는 요즘으로 치면 뉴라이트 단체나 마찬가지였다. 한용운이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그 일을 당하기 2년 전인 1904년 이용구와 송병준에 의해 창립된 이 단체는 동학이나 독립협회 출신들이 주축이 된 조직이었다.
동학과 독립협회는 가장 진보적인 단체들이었다. 동학은 민중혁명을 일으켰고 독립협회는 입헌국가 수립운동을 벌였다. 그런 곳에 몸담았다가 보수 우익으로 전향한 사람들이 만든 게 일진회다. 좌파 운동권에서 전향한 뒤 자유한국당이나 바른미래당 등에 뛰어든 대한민국의 뉴라이트들과 비슷한 행로를 걸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을 올바로 직시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우호적 태도를 견지하는 면도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