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 게바라의 1959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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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혁명 6년 뒤인 1965년,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고 새로운 혁명을 찾아 길을 떠났다. 쿠바에 이어 콩고와 볼리비아에서도 혁명에 도전했다. 그랬다가 1967년 39세 나이로 전사했다. 이 행적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열정적이고 진심 어린 혁명가였는지를 충분히 증명할 수 있을 것이다.
그 점은 혁명 동지인 카스트로도 잘 알고 있었다. 혁명 후에도 체 게바라는 카스트로에게 새로운 혁명을 끊임없이 제안했다. 위의 대담에서 "승리를 거둔 후에 체 게바라는 쿠바를 떠나 아르헨티나에서 혁명을 하고 싶다고 고집했습니까?"라는 질문이 나오자 카스트로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약속은 유지됐고, 나는 항상 '그 약속은 지켜질 테니 걱정 마시오'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체는 혁명에 대한 거대한 열정으로 가득 싸여 있었습니다."
체 게바라는 혁명 후에 장관급이 돼 국가 경영에 참여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의 생활수준은 일반 국민들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움베르토가 말한 수준은 아닐지라도, 상당히 괜찮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런 생활 수준이 그의 열정을 식히지는 못했다. 그는 또 다른 혁명들로 뛰어들었고, 그로 인해 숨이 끊어졌다. 따라서 혁명 이후의 생활수준을 근거로 그를 타락한 혁명가로 몰아붙이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조선일보>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지금까지의 역사를 돌아보면 상당수의 혁명가 혹은 개혁가들은 중산층 이상의 경제적 배경을 갖고 있는 이들이 많았다. 변혁을 이끄는 세력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나라를 보면, 남북국시대(발해·신라) 말기에 등장해 후삼국 시대를 열었던 지방 호족, 고려 말에 등장해 조선을 건국한 신진사대부, 조선 중기에 등장해 300년간 지배한 사림파(유림파) 등을 사례로 꼽을 수 있다. 서양사는 어떨까. 프랑스혁명 이후의 부르주아를 생각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그들은 기존의 주류 집단을 전복하기 위해 민중의 지원을 받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들은 새로운 세상 하에서 민중의 지위를 어느 정도 향상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이것이 인류가 이제껏 정치적으로 진보해온 방식 중 하나다.
만약 지금 우리 눈앞에서 표출되는 직접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열망이 한층 더 심화되고 그것의 실현을 뒷받침할 만한 기술적 변화가 수반된다면, 나중에는 민중이 독자적으로 혁명을 일으킬 수 있게 될 가능성이 크다. 하지만, 적어도 현재까지는 중산층 이상의 개혁그룹과 민중, 두 계층의 분업 하에 변혁이 이뤄져 왔다. 그렇기 때문에 혁명가나 개혁가가 부유했었다, 혹은 변혁 뒤 부유한 생활을 누렸다는 점을 근거로 위선적이라고 비판하는 건 설득력이 떨어진다.
<조선일보>의 칼럼의 진짜 의도는 무엇일까. 변혁하려는 사람의 배경을 곡해해 변혁에 대한 편견을 조장하는 것 아닐까. 개혁 그룹과 민중을 분리하려는 것 아닐까. 나아가 이 사회의 발전과 진보를 막는 데 있는 것 아닐까.
'1975년 사이공'이냐 '2019년 홍콩이냐'를 따질 상황이 아니다. 그냥 '2019년 서울'만 고민하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