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덕수궁 전경고종 강제 퇴위 후 경운궁은 덕수궁으로 이름이 바뀐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덕수궁은 그 영역이 1/3로 축소된다. 덕수궁의 이름을 ‘경운궁’으로 다시 바꿔야 한다는 논의가 최근 있기도 했다. 덕수궁을 가장 잘 조망할 수 있는 서울특별시청 서소문별관 13층 ‘정동전망대’에서 촬영한 사진. 사진 왼편 석조전 서관(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관) 뒤편으로 중명전이 보인다.
백창민
경운궁에 세워진 중명전이 덕수궁 담장 밖으로 밀려난 이유는 뭘까? 대한제국 때 경운궁은 지금보다 3배 넓은 규모였으나 고종 황제가 강제 퇴위당한 후 선황제(先皇帝)가 거처하는 궁으로 위상이 달라지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바뀐다.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후 일제가 경운궁을 축소하면서 중명전은 경운궁 밖에 놓이게 된다. 1912년부터는 서울에 주재하는 외교관 모임인 서울 구락부(Seoul Club)가 중명전을 임대해서 사용했다.
1925년 3월 12일 중명전에 화재가 발생해서 2층이 전소된다. 책과 신문을 두던 2층 서적실에서 시작된 화재로 중명전은 상당한 손상을 입는다. 이후 복구된 중명전은 구락부로 계속 사용, 해방 후 서울 클럽, 아메리칸 클럽으로 쓰인다.
1919년 고종이 세상을 떠난 후 일제는 선원전 구역 전각부터 해체, 매각해서 덕수궁 영역을 크게 축소한다. 경성제일공립고등여학교(경기여자고등학교), 경성여자공립보통학교(덕수초등학교), 구세군사관학교 같은 학교 부지와 경성방송국, 경성부민관이 덕수궁 영역에 자리를 잡는다. 1933년부터는 덕수궁을 일반에게 공원으로 개방하고, 1938년에는 덕수궁 석조전을 이왕가 미술관으로 바꾼다. 1934년 12월에는 연못을 만들어 스케이트장으로 사용하기도 했다.
창경궁이 '창경원'이라는 이름의 동물원, 식물원으로 전락한 것처럼 경운궁도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공원이 되었다. 해방 후 미소공동위원회가 석조전에서 열리면서 세인의 관심을 모으기도 하지만 왕실이라는 주인을 잃은 덕수궁은 쇠락의 역사를 걷는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중명전은 국유재산이 된다. 1963년 영구 귀국한 영친왕 이은과 이방자 여사 소유였다가 1977년 민간에 매각되어 개인 소유로 바뀐다. 이후 오랫동안 방치되면서 중명전은 크게 훼손되기도 했다. 2006년부터 문화재청이 관리하면서 2007년 2월 덕수궁에 다시 편입된다. 2009년 문화재청은 공사를 통해 중명전을 대한제국 당시 모습으로 복원했다.
오랫동안 방치된 중명전은 철저히 '잊혀진 도서관'이기도 하다. 우리 도서관사와 문헌정보학사를 보면 이완용, 민영기, 이재극 같은 친일파가 주축이 되어 추진한 '대한도서관'은 국립도서관 건립 시도로 거론하지만 중명전은 언급조차 하지 않는다.
중명전에 어떤 책이 얼마나 있었는지 판단할 근거가 부족해서일까. 우리 근현대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중명전을 도서관 역사에서 언급조차 하지 않는 건 이상하다.
'
광명'
이 아닌 '
암흑'
의 역사가 시작된 도서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