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관파천’의 현장, 러시아 공사관‘아관파천’은 일국의 왕이 자신의 나라에 있는 타국 공사관으로 피신한 초유의 사건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사바틴이 설계했다. 사바틴은 독립문을 비롯해 경운궁의 구성헌, 돈덕정, 정관헌과 러시아 정교회, 손탁호텔 같은 서양식 건물을 설계한 사람이다. 러시아 공사관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건물 대부분이 파손되어 지금은 3층 전망탑과 건물 일부만 남아 있다.
백창민
정동은 19세기 후반 서구 열강의 공사관이 모여 있던 곳이다. 1883년 미국 공사관, 1884년 영국 공사관, 1885년 러시아 공사관에 이어, 1889년 프랑스 공사관, 1891년 독일 공사관이 자리를 잡았다. 1901년 벨기에 공사관과 1902년 이탈리아 공사관이 정동과 가까운 서소문동에 각각 자리 잡았다. 이 일대에 외국 공사관이 몰린 이유는 뭘까? 교통이 편리하고 도성 안이면서 상대적으로 외진 곳이라 공사관이 자리 잡을 공간이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1895년 중전 민씨(명성황후로 추존)가 시해되는 을미사변이 일어나자 신변에 위협을 느낀 고종은 1896년 2월 11일 정동에 있던 러시아 공사관으로 1년 동안 피신한다. 이른바 '아관파천'. 일국의 왕이 자신의 영토에 있는 다른 나라 공사관으로 피신하는 초유의 사태가 일어난 것이다. 고종은 일본의 위협을 견제하기 위해 친일 내각을 치고 친러 내각을 구성한다. 아관파천으로 고종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일본의 한반도 침략에 맞서려 했으나 러시아와 일본은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를 맺으며 조선에서 이익을 챙기기 바빴다.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 지 1년 만인 1897년 2월 20일 고종은 경복궁이 아닌 경운궁(지금의 덕수궁)으로 환궁한다. 고종은 중전 민씨가 시해된 경복궁보다 외국 공사관으로 둘러싸인 경운궁이 더 안전하다고 느꼈다. 근대화 추진 장소로도 외국 공사관과 배재학당, 이화학당, 러시아정교회, 성공회 성당이 모여있는 정동이 더 적합했을 것이다.
외세에 흔들리지 않는 독립국가 건설의 필요성을 느낀 고종은 1897년 10월 12일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환구단에서 황제에 즉위한다. 황제 즉위와 함께 고종은 '광무개혁'을 단행한다. 근대적 토지조사사업과 상공업 진흥 정책을 추진하고, 각종 학교와 공장을 설립하며, 철도와 전차, 전화 같은 신문물을 도입했다.
구성헌, 돈덕전, 석조전, 정관헌, 중명전 같은 서양식 건물이 경운궁에 세워진 것도 이 때다. 경운궁에 있는 서양식 건물은 근대화를 이루려 한 고종의 의지를 담고 있는 것만 같다. 그러나 이름과 달리 대한제국은 '제국'도 '왕국'도 아닌 일본의 '속국'이나 다름없는 상황으로 전락하고 있었다.
'황실 도서관' 수옥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