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부고속도로와 강남 대개발의 시발점, 한남대교1966년 1월 19일 공사를 시작, 1969년 12월 25일 완공한 다리. ‘제3한강교’라는 이름과 달리 한강철교, 제1한강교(지금의 한강대교), 광진교,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에 이어 한강에 다섯 번째 놓인 다리다. 제3한강교는 1985년 한강 종합개발 공사 과정에서 ‘한남대교’로 이름이 바뀐다.
백창민
1966년 1월 19일 제3한강교(가수 혜은이가 1979년 불러서 크게 유행한 그 <제3한강교>다) 공사가 시작되는데, 지금의 한남대교다. 제3한강교 건설은 경부고속도로의 시발점이자 강남 땅값 상승의 신호탄으로 자리매김하지만, 당초 이 다리를 놓은 건 군사 전략상 이유 때문이다.
한국전쟁 때 수많은 서울시민이 피난하지 못하고 인민군 치하에 놓인 것은 한강 다리 폭파로 피난길이 막혔기 때문이다. 1960년대 중반까지 한강에는 한강철교(1900년 7월 완공), 제1한강교(지금의 한강대교, 1917년 10월 완공), 광진교(1936년 10월 완공), 제2한강교(지금의 양화대교, 1965년 1월 완공) 4개 다리만 있을 뿐이어서, 서울시민의 신속한 피난을 위한 추가 다리 건설이 필요했다.
1960년대 후반은 남북한 군사적 긴장이 심했던 시기다. 1964년 한국의 베트남전 파병 후 남북한 무력 충돌은 1967년 784건, 1968년 985건으로 급증한다. 남파 간첩 수도 1966년 50명에서 1967년 543명, 1968년 1247명으로 크게 늘었다.
굵직한 사건도 연이어 터진다. 1967년 1월 19일 해군 경비정 당포호가 북한의 포사격을 받고 침몰한다. 1968년 들어서는 1월 21일 김신조를 비롯한 북한군 특수부대 요원의 청와대 공격, 1월 23일 푸에블로호 나포 사건, 11월 2일 울진 삼척 지역 북한 게릴라 침투 사건이 터졌다. 1969년 4월 15일에는 미국의 EC-121형 정찰기가 격추되기도 했다.
이 시기 북한은 왜 전쟁에 준하는 도발을 감행했을까. 박태균 교수는 남한의 베트남 파병을 억제하기 위해 북한이 공세를 강화했다고 해석한다. 한반도에서 안보 위기를 일으켜 남한 병력의 베트남 증파를 막아 북베트남을 도우려 했다는 것이다. 북한과 북베트남, 김일성과 호치민의 긴밀한 관계를 생각하면 이런 해석도 충분히 가능하다.
안보 위기 속에서 박정희 정권은 국민동원체제를 통해 '병영국가'를 완성한다. 징병제 강화, 향토예비군 창설, 주민등록제도 시행이 모두 1968년을 전후로 이뤄진다. 광화문 사거리에 충무공 동상을 세우고 국민교육헌장을 제정한 것도 이때다. 1975년에는 캄보디아(4월 17일), 베트남(4월 30일), 라오스(5월 8일) 세 나라가 도미노처럼 공산화되면서 안보 위기의식이 크게 일었다. 강남 개발 이면에는 국제 정세 변화와 남북 군사적 긴장도 큰 영향을 미쳤다.
'제2서울'로 개발된 강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