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사랑을 그리다>의 양녕대군(손병호 분). 극중에서는 양안대군이란 이름으로 나온다.
TV조선
TV조선 드라마 <대군-사랑을 그리다>에 세종대왕의 큰형인 양녕대군(손병호 분)이 등장한다. 드라마 속 이름은 양안대군이지만, 실제로는 양녕대군이다. 드라마 속에서 그는 탐욕스러운 이미지를 띠고 있다. 인정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다.
또 세종의 아들이자 자신의 조카인 수양대군(극중에서는 진양대군)이 왕실의 분란을 일으키도록 유도한다. 세종의 장남인 문종의 혈통에서 왕위가 계승되기보다는 세종의 둘째아들인 수양대군이 왕위를 계승하도록 세 결집을 도와준다. 동생인 세종한테 왕위를 빼앗긴 원한을 풀기라도 하려는 듯이, 드라마 속의 양녕대군은 수양대군을 부추기고 세종의 후손들을 분열시키고 있다.
구체적 줄거리는 작가의 상상에서 나왔지만, <대군> 속의 양녕대군은 <태종실록> 속의 양녕대군과 대체로 일치한다. 성격이나 이미지가 흡사하다. 실록 속의 양녕대군은 동생한테 자리를 양보할 사람이 절대 아니다. 유능한 동생에 대한 질투심을 드러냈다. 그래서 아버지 태종이 항상 걱정스럽게 양녕을 지켜봐야 했다.
양녕이 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이유 음력으로 태종 14년 10월 26일자(양력 1414년 12월 8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태종은 세자 시절의 양녕에게 "세자는 동생들과 비교할 바가 아니다"라고 나무랐다. 자신을 동생, 특히 충녕대군(세종)과 비교하지 말라는 경고였다. 충녕에 대한 양녕의 질투심을 경계하는 태종의 심리를 보여주는 기록은 이 외에도 여럿이다.
그런 질투심을 품은 사람이 동생한테 선선히 왕위를 내놓기는 쉽지 않다. 그가 세자 자리에서 물러난 것은 동생에 대한 양보심 때문이 아니라, 듣기에도 민망한 일련의 성추문 때문이었다. 기생 초궁장을 놓고 큰아버지 정종과 삼각관계를 형성한 적도 있었다.
주로 유부녀들로 구성된 무수리들의 숙소가 궁에 설치되자, 세자 시절의 양녕은 이것도 놓치지 않았다. 태종 17년 윤5월 21일자(1417년 7월 5일자) <태종실록>에 따르면, 그는 일부 무수리들에게 자기 숙소 근처에서 불침번을 설 것을 요구했다. 측근들은 그러지 마시라며 세자를 만류했다. 세자가 왜 그러는지 너무도 명백했기 때문이다. '#Me Too'가 벌어졌다면, 양녕은 결코 무사치 못했을 것이다.
실제론 그런 사람이었는데도, 양녕은 '유능한 동생한테 시원하게 양보한 멋있는 형'으로 후세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태종실록>에 따르면 분명히 그런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말이다.
오늘날에는 스마트폰으로도 조선왕조실록을 열람할 수 있지만, 조선시대에는 실록 열람이 쉽지 않았다. 일반인들은 물론이고 선비들한테도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런 이유 때문에 양녕의 실제 모습이 후세에 알려지지 않은 것은 아니다. 거기엔 다른 이유가 있다. 정치적 이유다.
양녕은 1462년 세상을 떠났다. 약 200년 뒤인 1659년부터 조선 정계는 이른바 예송논쟁에 휘말렸다. 인조의 차남인 효종 임금이 세상을 떠나자, 효종의 세금 인상 정책에 불만을 품은 보수세력이자 다수파인 서인당은 '효종은 차남이므로 어머니인 자의대비가 1년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며 효종을 격하시켰다.
이에 맞서 반대파 남인당은 '차남이지만 왕이 됐으므로 적장자에 준해, 자의대비가 3년간 상복을 입도록 해야 한다'고 효종을 격상시켰다. 이 문제를 중심으로 양당은 정권 쟁탈전을 벌였다. 1659년의 제1차 예송에서는 서인당이 승리했다. 효종이 인조의 차남으로 인정된 것이다.
하지만 1674년 제2차에서는 남인당이 이겼다. 효종의 부인인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자, 15년 전과 똑같은 논쟁이 벌어졌다. 자의대비가 며느리를 위해 얼마 동안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가 문제됐던 것이다. 이때는 남인당이 승리해, 효종이 적장자로 인정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