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군-사랑을 그리다>.
TV조선
수양대군이 왕으로서 죽은 뒤에, 고위급 신하들은 '종'이 붙은 시호를 부여하기로 합의했다. 예종 즉위년 9월 24일자(양력 1468년 10월 9일자) <예종실록>에 따르면, 신하들이 합의한 묘호는 신종(神宗)·예종(睿宗)·성종(聖宗)이었다. 당시 임금인 예종(睿宗)은 아직 죽지 않았으므로 '예종'이란 묘호가 없었다. 수양대군한테 부여하기로 합의한 묘호 후보 셋 중 하나인 예종이 훗날 그 아들의 묘호가 된 것이다.
갓 즉위한 예종은 18세였다. 이 나이 때의 왕들은 대체로 신하들의 말을 잘 듣는다. 그런데 예종은 실권이 없었다. 왕대비인 정희왕후 윤씨가 수렴청정을 통해 통치권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희왕후는 수양대군의 부인이다.
어머니인 정희왕후한테 통치권이 있었기 때문에, 예종은 신하들의 건의를 처리하기에 앞서 어머니의 의중부터 살펴야 했다. 정희왕후가 안 된다고 했던 모양이다. 예종은 신하들의 제안을 거부했다. '종'이 붙은 묘호를 아버지한테 부여하기를 거부했던 것이다.
위의 <예종실록>에 따르면, 예종은 대신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아래 인용문 속의 대행대왕(大行大王)은 '죽었지만 아직 시호를 받지 못한 왕'을 지칭한다. 재조(再造)는 '국가를 새로 만들었다'고 할 정도로 획기적 발전을 이룩했다는 의미다.
"대행대왕께서 재조하신 공덕이 있다는 사실을 일국의 신민들 중에 누가 모르겠는가? 묘호를 세조로 정할 수는 없는 건가?"아버지 수양대군에게 '조'를 붙이자는 예종의 말은 당시 상황 하에서는 꽤 파격적이었다. 474년간의 고려왕조에서 '조'가 붙은 사람은 건국시조인 태조 왕건뿐이다. 왕건 이후의 고려왕들 중에는 '조'가 붙은 임금이 없다.
이런 관행은 1392년에 이성계가 조선을 세운 뒤에도 한동안 이어졌다. 76년 뒤인 1468년에 제8대 주상 예종이 신하들과 위의 대화를 나누던 시점까지도 이어졌다. 이때까지 조선왕조에서는 태조 이성계 외에는 아무도 '조'를 받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수양대군한테 '조'를 붙이자는 예종의 제안은 뜻밖의 것이었다.
그런데 '조'를 붙이자는 제안도 의외였지만, '세조'로 하자는 제안은 더욱더 의외였다. 세종의 묘호와 글자가 같아서만은 아니었다. 동아시아 역사에서 '세조'란 묘호가 풍기는 이미지 때문이었다.
유방이 세운 한나라는 서기 8년 왕망에 의해 멸망했다. 한나라를 부활시킨 사람은 유방의 9대손인 광무제 유수다. 역사가들은 광무제가 부활시킨 이후의 한나라를 편의상 후한(後漢)으로 지칭한다. 바로 그 광무제의 묘호도 세조였다. 왕조를 부활시키는 '재조'의 공로를 세웠다는 의미였다.
칭기즈칸이 이룩한 몽골제국을 중국 땅에 정착시킨 군주는 손자 쿠빌라이칸이다. 쿠빌라이는 도읍을 지금의 베이징으로 옮기고 중국식 국호를 원(元)으로 제정했다. 그리고 몽골제국이 농경지대 중국에 정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쿠빌라이의 묘호도 세조다. 재조의 공로가 있다고 인정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