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형벌 도구. 서울시 합정동의 절두산순교성지에서 찍은 사진.
김종성
관료가 관기와 불법 접촉을 하는 것만 처벌한 게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는 행위를 해도 징계를 받을 수 있었다. 약한 수준의 연(緣)이 닿아도 그럴 수 있었다. 이로 인해 징계에 더해 망신까지 사는 일도 있었다. 이를 잘 보여주는 사례가 있다. 명종·선조 때 사람인 임제(1549~1587년)의 경우다.
임제는 관료 겸 문장가였다. 호걸이란 평가를 받을 정도로 시원스러운 인물이기도 했다. 그가 종5품 평안도사(平安都事)가 되어 평양으로 이동할 때였다. 도사는 감찰 업무를 수행했다. 종5품이면 지금으로 치면 중앙관청 과장급 정도다.
임제는 평양 가는 길에 개성을 통과했다. 개성 도로변에 그곳 관기 황진이의 무덤이 있었다. 황진이는 16세기 초반에 태어났고, 임제는 중반에 태어났다. 임제가 그 무덤을 지난 시점은 황진이가 죽은 지 몇십 년 이내였을 것이다.
대로변에서 전설의 황진이 무덤을 발견한 임제는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즉석에서 글을 지어 추모제를 올렸다. 이게 화근이 됐다. 관료가 관기 무덤에 제사를 올리는 것은 올바른 처사가 아니라는 비판이 나왔다. 그런 비판이 조정 분위기를 주도했다.
이로 인해, 임제는 임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파직을 당했다. 제사를 지내자마자 소문이 한양까지 퍼지고, 파면도 신속히 이뤄졌던 것이다. 광해군 최측근인 어우당 유몽인의 <어우야담>은 이 상황을 이렇게 정리했다.
"지금 송도(개성) 대로변에 유명 기생인 진이의 무덤이 있다. 임제가 평안도사가 되어 송도를 지날 때 그 무덤에 축문을 지어 제사를 지냈다가 결국 조정의 비판을 받았다."
관리가 관기의 무덤에 조의를 표하는 것만으로도 잘못하면 파직을 당할 수 있었다. 이런 사회에서, 관리가 공공연하게 관기와 접촉하고 잠자리까지 같이한다는 것은 웬만한 강심장으로는 힘든 일이었다.
물론 그런 속에서도 불법적 접촉이 없지는 않았다. <춘향전> 속의 변학도처럼 관직을 욕망 충족의 도구로 활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어떤 경우에는, 관기가 신분상승을 목표로 관료에게 의도적으로 접근해 첩이 되려고 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예외였다.
그리고 그런 예외적인 상황에 놓인 기생과 관료는 주변 시선을 의식해 조심스레 행동할 수밖에 없었다. 사극에서처럼, 나라의 녹을 먹는 사람이 그런 상황에서 공공연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는 힘들었다.
섣불리 행동했다가는 형법에 저촉되어 곤장을 맞을 수도 있었다. 그래서 기생과 접촉하는 관료는 자신의 행동이 단속 대상이라는 걸 의식하면서, 주변을 향해 레이더를 가동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실정을 감안하면, 사극 속 남성들의 대담함은 현실과 거리가 있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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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시사와역사 출판사(sisahistory.com)대표,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친일파의 재산,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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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무덤에 절했다가 파직된 남자, 이게 실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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