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회영절대 자유를 추구한 아나키스트이자 독립운동가 이회영. 조선 최고의 명문가 집안 6형제를 모두 독립운동으로 이끈 인물이다.
홍윤호
1932년 11월 초, 중국 상하이를 떠난 영국 선적 남창호가 만주 다롄에 들어가고 있었다. 별다른 이상이 없는 평범한 여객선이었다. 갑자기 일본 경비선 두 척이 속도를 내며 달려와 배를 멈출 것을 강요하고, 일본 경찰이 선내에 서둘러 진입하였다. 총을 든 채였다.
경찰들은 바로 배 가장 밑바닥의 4등 선실로 들어가 살기등등 해서 누군가를 찾았고, 곧 그들은 중국인 복장을 한 60대 노인 한 명을 체포했다.
"다 알고 왔다! 가자!"노인은 체념하고 순순히 따라갔다. 이미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듯한 경찰의 체포를 피해 도망칠 수도, 그럴 수단도 없었다.
다롄경찰서로 압송된 그는 고등계 형사들에 의해 64세 나이가 전혀 고려되지 않는 악독한 고문을 당했다. 불에 달군 쇠가 살점을 파고 들고, 온몸에 매를 맞으며 허리가 부러졌다. 그러면서도 자백을 거부한 그는 온몸이 피투성이인 채로 죽음을 맞았다.
다음 날 경찰은 그가 유치장 안에서 자결했다고 발표했지만, 이를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었다.
만주 군벌인 장쉐량과 연결해 무기를 공급받아 일제에 항전할 지하조직을 만들고, 만주 침략의 선봉장 일본 관동군 사령관 무토 노부요시를 암살할 계획을 갖고 64세 나이에 만주행 배를 탄 인물. 청년 동지들을 희생시키느니 자기가 직접 가서 거사를 결행하겠다고 고집을 부려 단행한 만주행은 그를 돌아올 수 없는 길로 안내했다.
나중에 그의 아들 이규창과 아나키스트 조직인 남화연맹은 그의 거동에 대한 비밀을 일제 경찰에 밀고한 밀정 세 사람을 찾아내서 처단한다. 밀정 중에는 그의 조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젊은 동지들의 선봉이 되겠다며 죽음의 길을 자청한 노인, 그의 이름은 이회영이었다.
가장 보수적인 유교 사대부 집안이자 명문 관료 집안의 부잣집 도련님으로 태어났지만, 가장 가난하게 살며 당시로서는 가장 진보적이고 과격하기까지 한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혁명의 길을 간 독립운동가.
개인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사회, 누구에게도 지배받지 않으며 지배하지도 않는 이상적 공동체 사회를 꿈꾸었으며, 누구보다 실천적인 삶을 살았던 인물, 아나키스트이자 역사가였던 신채호, 의열단 비밀 참모 류자명,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 한국 대표 백정기 등과 교류하며 그들의 동지이자 정신적 지주였던 인물.
그래서 독립운동의 한 줄기인 아나키즘 운동의 지도자였던 인물, 대한민국 임시정부 인사들과 교류하면서도 임시정부의 노선과 공산주의 운동을 모두 비판하며 독자적인 무장투쟁의 길을 간 인물, 그래서 그런지 해방 후 남북 양쪽에서 비주류로 외면당하며 잊힌 인물, 우당 이회영.
이회영과 그의 집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