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천왕사 터 선덕여왕릉 들어가는 입구에 자리한 사찰. 터만 남아 있지만, 남아 있는 흔적만으로도 규모가 상당히 큰 사찰이었음을 알 수 있다.
홍윤호
선덕여왕과 진성여왕, 그리고 박근혜 위에서 보듯 선덕여왕은 자기 시대 정치의 주체였다. 애초에 관심과 욕망이 강했던 만큼 왕이 된 이후에도 자기가 주도적으로 정치를 이끌어 갔다.
그런데 과거 박근혜가 대통령 재직 시에 일각에서 그녀를 선덕여왕에 비유하는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아마 박근혜 주변에서 희망 사항으로 흘러나온 이야기인 듯싶다.
처음 박근혜가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 좋든 싫든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최초로 여성이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는 데 의미가 있었다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여성의 사회적 진출이 늘고, 능력 있는 여성이 인정받을 수 있는 분위기가 형성되면서 이제 최고 권력까지도 얻게 된, 대단히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그저 '최초'라는데 의미가 있었을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으며 오히려 여성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 이미지만을 남기게 되었다. 남성이든 여성이든 성별과 상관없이 개인의 능력에 따른 결과이므로 굳이 "여성"임을 강조할 필요는 없지만, 대통령 변호인이나 측근들이 '여성'임을 굳이 강조하면서 오히려 부정적 이미지만을 가속화시키기도 했다.
그러니 박근혜를 선덕여왕에 견줄 수는 없다. 무엇보다 그녀는 정치의 주체가 아니었다. 그러면 또 다른 여왕, 신라 말의 진성여왕은 어떨까.
실제 역사적 사실이야 어떻든 일반적인 인식 상 선덕여왕은 성공한 여왕이고, 진성여왕은 실패한 여왕이다.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진성여왕의 무덤이 없다는 사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어딘가에는 있겠지만, 진성여왕의 무덤으로 알려져 인정된 것이 없다. 그 정도로 외면되어 온 것이다. 이렇듯 차이가 나는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적 상황이 달랐기에 섣불리 성공과 실패를 논할 수는 없지만, 이러한 인식에는 이유가 있다.
앞에서 보았듯 선덕여왕은 새로운 세력을 키워 주면서도 기존 보수 세력을 적절히 포용하는 나름의 리더십을 내세워 정치력을 발휘, 당시의 위기 상황을 정면으로 돌파해 나갔다. 그리고 이것은 결국 통일 신라의 길을 열게 된다. 결과를 봐도 실패한 리더십은 아닌 셈이다.
그에 비해 신라 말의 진성여왕은 결과를 놓고 봤을 때 실패한 왕이라 할 수밖에 없다. 신라가 내부적인 권력 쟁탈전과 장기간 대외적 평화에 따른 이완 현상, 사치 풍조, 조세 비리 등으로 서서히 쇠퇴해가는 상황에서 왕이 된 그녀에게 신라 멸망의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는 없다. 과거 역사서 저자들은 남성들이라 이런 편견으로 신라 멸망의 대표적인 책임을 덮어씌우기는 했지만, 엄밀히 말하면 신라가 멸망해 가는 과정에서 왕이 된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지울 수는 없다.
하지만 분명히 그녀의 책임은 있다. 바로 국정 운영 부분에서다. 신라 말 경문왕이 사망한 뒤에 그의 아들, 딸들이 계속 왕위를 계승하는데, 헌강왕 – 정강왕 – 진성여왕으로 이어진다. 세 왕 모두 경문왕의 자식들이다. 일반적으로 전문 학자들에 의하면, 진성여왕은 자신의 의지에 따라 왕이 되었다기보다 경문왕의 자식들이 왕위를 계승하기를 바라는 세력에 의해 왕이 되었다고 본다.
이때 경문왕의 동생인 숙부 위홍이 그녀의 공식적인 후원자가 된다. 헌강왕 때부터 경문왕계를 대표하며 국정의 주도권을 장악한 인물이 바로 위홍이다. 3대에 걸쳐 실질적인 권력을 갖고 국정을 장악한 인물인 것이다. 경문왕의 동생이었으므로 자신이 왕이 될 수도 있었지만, 막후의 실질적인 권력을 더 선호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하여간 진성여왕은 이런 상황에서 모든 권력과 국정 운영을 위홍에게 의지하였다. <삼국사기>에서는 위홍이 여왕의 애인(불륜관계)이었다고 하고, <삼국유사>에서는 아예 부부였다고 한다. 근친혼이 얼마든지 가능한 시대여서 혼인을 했을 수도 있다.
어쨌든 국정을 주도했던 위홍이 하필이면 여왕 재위 2년 만에 사망한다. 국정에 대한 지식과 경험 부족, 의지 부족으로 국정 운영을 위홍에게 전적으로 의지했는데 그가 죽어버린 것이다. 이때부터의 역사 기록을 보자.
그래도 진성여왕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했다<삼국사기>에는 위홍 사망 후 여왕이 젊은 미남 2, 3명을 남몰래 궁궐에 불러들여 음란하게 지내고, 그들에게 중요한 벼슬자리를 주어 나라의 정치를 맡기기도 하였는데, 그러자 아첨꾼이 생기고, 뇌물을 주는 일이 공공연하게 벌어지는 등 국가의 기강이 문란해졌다는 기록이 있다.
또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공통으로 나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있다. 여왕 때에 위홍 등 3, 4명의 총신들이 권력을 제멋대로 부려서 정치가 흔들렸다고 한다. 여기에 백성들이 이 같은 정치를 비판하고 길거리에 비판 글을 남기니, "왕거인"이라는 인물의 짓(요즘 말로 하면 왕거인이 근거 없는 글로 백성들을 선동했다는 이야기)이라고 하며 그를 감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왕거인이 결백을 주장하며 시를 지어 하늘에 호소하자, 하늘이 옥에 벼락을 내리쳐서 풀려났다고 한다.
현대적으로 해석할 경우, 하늘이 '민심'을 상징한다고 보면, 결국 이 이야기는 결백한 왕거인에 대한 민원과 정부에 대한 비판이 빗발치자 그를 풀어주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진성여왕의 문제점은 바로 이 부분이다. 국정 운영에 능력과 의지가 부족했던 그녀는 측근이자 애인(혹은 혼인한 남편-혼인했다면 아마 경문왕계 후손을 배출하기 위한 정략결혼인 듯)인 위홍에게 모든 국정을 맡겼고, 이것은 극소수 인물들에 의한 국정 농단을 낳았다. 인맥과 뇌물을 통한 관료 등용은 거대한 부패 집단을 만들어냈고, 이는 조세 부정을 낳았다. 부정부패와 자연재해로 세금이 제대로 걷히지 않자 지방에 관리들을 보내 강제로 세금을 거두려고 하였다.
결과는 원종과 애노의 난을 비롯한 전국적인 농민 봉기였다. 이러한 농민 봉기의 와중에 중앙 권력은 약해지고 지방에서 독자적 세력이 등장, 호족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알다시피 이들 호족세력이 기반이 되어 궁예와 견훤 정권이 탄생한다.
봉건시대에 국정 운영의 중심축은 왕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이 왕이 어떤 입장에서 국정을 운영하느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질 가능성이 크다. 어려운 상황에서 기존 세력과 새로운 세력을 적절히 등용하며, 새로운 세력에게 적극적으로 기회를 주어 힘을 실어준 선덕여왕과, 국정 운영에 대한 관심과 의지가 부족한 데다 극소수의 특정 인물들에게 권력을 몰아주고 국정 농단을 허용하여 신라의 몰락을 자초했던 진성여왕. 두 여왕의 국정 운영은 명백하게 결과가 말해준다.
자, 그렇다면 박근혜는 어느 쪽에 가까울까. 진성여왕이 오늘날의 전직 여성 대통령과 결정적으로 다른 부분은 있었다. 진성여왕은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었다. 능력 부족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오빠 헌강왕의 아들이 발견되자 기뻐하면서 스스로 왕 자리에서 물러나고 그에게 왕위를 계승하였다. 효공왕의 즉위이다.
경문왕의 혈통으로 왕위를 잇고자 하는 의지의 표현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능력 부족을 시인한 부분이기도 하다. 덕분에 말년은 편안했다. 신라 말기의 그 흔한 정변에 의한 죽음을 피해간 것이다.
때로 역사는 현재 우리 사회에 많은 시사점과 풍부한 간접 경험 사례를 준다. 선덕여왕의 무덤을 걸어 내려오며 많은 생각을 하였다. 누구 말대로 역사는 그저 같은 패턴으로 반복되는 것인가, 아니면 비슷해 보여도 세부 내용은 모두 다른 수많은 영화나 소설처럼 창조적 모방과 응용이 이어지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