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덕사지 당간지주 당나라 황제를 위해 지었다는 사찰터 망덕사지. 지금은 건물터와 당간지주가 남아 있다.
홍윤호
설화에 숨은 시대 현실과 비판 의식 왕이 일반인을 향해 '날 만났다는 걸 말하지 말라'고 하는 이야기는 불교와 관련된 설화에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이럴 때 등장하는 일반인은 보통 가난하거나 볼품없이 생긴 사람, 혹은 아이들이다. 즉, 대개 사회적 약자로 보이는 사람들인 셈.
그런데 여기서 반전이 일어난다. 갑자기 그가 '왕도 석가(혹은 보살)를 만났다는 걸 말하지 말라'고 하고는 순식간에 사라진다. 왕이 당황해서 쫓아가지만 -물론 왕의 체면이 있지 자기가 직접 쫓아가지는 않는다- 그를 발견하지는 못한다.
이런 이야기들은 일차적으로 정치권력을 견제하는 종교적 권위를 보여주는 이야기이다. 보통 종교계 쪽에서 나온다. 최고의 현실 권력을 가졌다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하는 종교의 권위를 무시하지 말라는 의미다. 그래서 이런 이야기에서 왕은 항상 자신을 낮추고 종교계에 무엇인가를 베푼다.
하지만 조금 더 파고 들어가면, 화려하고 겉치레가 많아진 왕이라는 현실 권력에 대해서 스스로를 낮추고 '본질'을 추구하라는 일반인 혹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한다. 약해 보이는 사람이라고 우습게보지 말라는 의미에 더하여 종교에 현실의 권력 관계가 반영되는 세태를 비판한다. 겉으로 보이는 화려함과 신분의 격차가 불교에 그대로 반영되어 불교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현실에 대한 비판이다.
알고 보면 이 초라한 행색의 승려가 했던 말은 왕에게만 한 이야기가 아니다. 어쩌면 당시 망덕사 낙성식에 참여한 어느 승려가 실제로 했던 비판적인 목소리가 반영된 이야기일 수도 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은 고려시대 몽골 침입기를 온몸으로 겪은 동시대 사람이다. 그것도 세속을 초월해 도만 닦은 승려가 아니고 왕에 의해 국사의 자리까지 올라간 승려이다. 몽골 침입에 온 국토가 유린당하는 모습. 동시에 강화도에 피난 간 최씨정권과 불교계가 강화도에서 호의호식하며 온갖 행사와 이벤트를 벌이면서도 정작 몽골군과 정면 대결해서 싸우지는 않는 모습을 보며 당시의 현실 권력에 비판적인 의식을 갖지 않았을까.
아니나 다를까 이 이야기가 실린 감통 편의 몇몇 이야기들은 은근히 현실 정치권력과 불교계의 허위의식을 비판한다. 그리고 <삼국유사>에 실린 설화 곳곳에서는 신라 때의 빈부격차와 화려한 면에 가려진 어두운 면이 자주 고발되고 있다.
<삼국유사>가 교과서 표현처럼 단순히 고려 후기 몽골 침입에 맞서 민족의식을 높이는 데 기여한 역사서만은 아닌 셈이다.
아, 물론 이 본질을 넘어서서 이야기를 변질시켜서라도 기어이 자기 과시욕을 드러낸 왕도 있다. 조선시대 세조다.
강원도 오대산에서 동자로 변신한 문수보살을 만나 피부병을 치료하지만-여기까지는 위 이야기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 문수보살이 자기를 만났다는 말을 하지 말라고 하고 사라졌으니까-. 상원사에 숨은 자객을 고양이가 튀어나와 알려줘서 암살을 피하는 기적을 만난다. 본래 이야기에 덧붙여진 이야기이다. 즉, 자기가 천명을 받아서 쉽게 죽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속리산 법주사 입구의 어느 소나무가 자기 지나갈 때 알아서 팔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정2품의 파격적인 벼슬을 내린다.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이 소나무에 자객이 숨어 있는 것을 소나무가 가지를 들어 숨은 자객을 드러나게 함으로써 암살을 피할 수 있었다고도 한다. 어느 이야기든 본질은 같다) 이런 파격적인 권한을 가진 사람은 왕 이외에는 없으니 국왕의 권위와 권력을 한껏 과시한 셈이다.
불교 사찰과 관련된 스토리에 자기 권력을 과시하는 스토리가 포함되었으니, 세조의 이런 자존감과 과시욕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다. 물론 불교를 철저히 억눌렀던 억불정책의 조선시대에 유일하게 불교를 보호한 왕이었으니 이런 스토리를 넣어도 불교계가 뭐라고 하지는 못했을 거다.
그래서 오늘날 남아 있는 세조와 불교계와의 스토리에는 왕이 자신을 낮추거나 고개를 숙이는 예가 없다. 항상 불교계 위에 서서 불교계에 뭔가 특혜를 내리는 이야기 구조를 갖고 있다. 왕의 권위와 권력을 빌려서라도 생존이 절박했던 조선시대였으니 당시 불교계는 이런 이야기 구조를 인정하지 않았을까.
하여간 <삼국유사>에 실린 이 이야기는 왕과 불교계, 그리고 당시 시대 현실을 어느 정도 통찰할 수 있는 풍성한 의미를 담고 있다. 무엇보다 왕권과 친밀하고 가까우면서 지배세력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때로는 왕권을 견제하거나 비판하기도 하고 당시 신라의 일반 백성들과의 연계 고리 역할도 하는 불교계의 모습도 담겨 있다.
초라한 승려로 변신한 석가의 흔적이 마지막에 머무른 곳이 당시 신라인들의 성지이자 마음의 고향이랄 수 있는 남산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신라 민중들이 어렵지 않게 불교를 가깝게 대하고 그들의 신앙심이 골짜기마다 곳곳에 펼쳐진 경주 남산.
경주에서 울산으로 가는 루트(남산 동쪽과 토함산 일대)에 왕권과 왕실, 신라 지배층의 힘과 영향력이 표현된 사찰과 문화유산(불국사, 석굴암, 사천왕사지, 망덕사지, 신라 및 통일신라 여러 왕의 무덤 등)이 많이 남아 있다면, 경주에서 양산으로 가는 남산 서쪽 루트는 상대적으로 토착적, 민간적 요소가 강한 문화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다.
바로 이 남산 서쪽 골짜기, 석가의 흔적이 머무른 곳이 지금의 석가사지와 불무사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