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등사를 감싸고 있는 삼랑성.
이승숙
당시 공녀로 징발되는 모습을 <고려사>에서는 이렇게 기술해 놓았다.
"고려 사람들은 딸을 낳으면 바로 숨기고, 드러날까 두려워 이웃에게도 알리지 않는다. 원나라 사신이 오면 군인과 관리가 집집마다 수색하여 만약 여자를 숨기기라도 하면 이웃을 잡아가두고 친족까지 잡아들여 나라를 소란케 한다. (중략) 뽑힌 여자의 부모와 친족은 밤낮으로 울어 곡소리가 끊이지 아니하고, 떠날 때는 옷자락을 붙잡고 발을 구르며 쓰러지기도 하고 길을 막고 울부짖다가 슬프고 원통하여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자, 목매어 죽는 자, 근심과 걱정으로 기절하는 자와 피눈물을 쏟아 눈이 먼 자도 있다."80년간 계속된 공녀 수탈집집마다 딸을 감추어 두고 내놓지 않으니 여인들을 수색하느라 전국이 마치 전쟁터나 매한가지였다. 개들도 낯선 수색원을 보고 어찌나 짖어댔던지 "개들도 편안할 수 없었다"는 기록이 남아 있을 정도였다. 오죽 했으면 조혼의 풍습까지 다 생겼을까. 공녀로 딸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일찍 결혼을 시키는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딸이 열두서너 살만 되면 서둘러서 혼인을 시켰다.
1274년(원종 15년)에 시작된 몽골의 공녀 요구는 충숙왕 4년(1335년)에 이르러서야 폐지됐다. 하지만 이후로도 암암리에 공녀 요구가 계속되다가 원나라의 폐망과 함께 끝난다. 무려 80여 년간 고려의 여인들이 원나라로 뽑혀 가고 끌려간 셈이다.
공녀는 두 해에 한두 번 꼴로 보냈다. 1320년(충숙왕 7)에는 53명의 미혼여성과 23명의 화자(火者, 거세된 환관)를 보냈는데 이는 가장 많이 보낸 경우였다. 80년간 보낸 공녀의 수는 176명 정도였다고 기록에 나와 있다. 하지만 비공식적으로 보내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니, 모두 합하면 이보다는 훨씬 많을 것이다.
공녀로 간 고려의 여인들은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을 탓하며 비관 속에 지낸 것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자신이 처한 환경을 개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고려 여인들은 영리하고 지혜롭게 처신해서 점점 자신들의 입지를 넓혀갔을 것이다. 마침내 의복이며 신발, 모자 등의 차림새에서 고려의 풍습이 원나라 황실과 일반에 이르기까지 두루 퍼져 유행을 할 정도였다고 하니, 그녀들의 영향력을 짐작해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