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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숙
글로 나라를 빛낸 이규보
이규보의 아버지는 당시 최고의 사학교육기관인 최충의 문헌공도(文憲公徒)에 아들을 입학 시켰다. <고려사>에 보면 "무릇 과거를 보려는 자는 반드시 구재학당(문헌공도)에 들어가서 배웠다"라고 나와 있을 정도로 그곳은 당시 최고의 명문 사학이었다. 과거를 통해서만 입신출세를 할 수 있었으니 문헌공도에서의 공부는 지극히 당연한 수순이었다.
이렇게 물심양면으로 뒷받침을 했건만 이규보는 번번이 부모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 본시험인 '예부시'를 보기 위해서는 예비시험인 '국자감시'에 합격을 해야 하는데 이규보는 이 예비시험에 연거푸 세 번씩이나 떨어졌다. 천재로 소문이 자자했던 그였는데, 어떤 연고로 그렇게 낙방을 했던 것일까.
대개의 경우 18살 무렵이면 예비시험인 국자감시에 합격을 했다. 그러나 이규보는 처음 시험을 본 16살부터 내리 세 번씩이나 떨어지고 나서 남들보다 늦은 22살 때에야 겨우 합격을 할 수 있었다. 재수에 삼수를 거쳐 사수까지 했으니, 지금에 봐도 딱하기 짝이 없다. 네 번 째 본 시험에서 비로소 일등으로 합격했지만, 천재로 소문났던 그의 명성은 바닥에 떨어진 지 오래였다.
과거에 급제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형식과 규격에 맞춘 일종의 모범답안을 써야 하는데 이규보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유로운 정신을 추구하는 예술가의 피가 몸에 흐르고 있었다. 그러니 어찌 틀에 자신을 가둘 수 있을 것인가. 그는 당시 유행하던 시문을 짓기보다는 자신만의 생각을 글에 담았다. 그는 창의적이고 독창적인 것을 추구했고 또 그 길로 나아갔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만의 문학 세계에 빠져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연거푸 세 번씩이나 낙방의 쓴 잔을 마셔야 했고, 집안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규보가 거듭해서 과거시험에 낙방한 원인을 그의 '연보(年譜)'에는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공은 이 4~5년 동안 술로 기세를 부리며 마음대로 살면서 스스로를 단속하지 않고 오직 시 짓는 것만 일삼고, 과거에 대한 글은 조금도 연습하지 않았으므로 잇달아 응시했어도 합격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