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원 중때로는 시시껄껄하게
이희동
산들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문뜩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다. 4~5살의 나는 또래 아이들보다 머리 하나가 큰 아이였지만 놀이터에서 놀다보면 나보다 작은 아이들에게 맞고 울기 일쑤였다. 아파트가 떠나가도록 우는 소리가 들리면 그게 바로 나였다는 어머니 기억도 있지만, 나 역시 나보다 작은 아이들에게 빙 둘러싸여 얻어맞은 기억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어머니는 그런 내게 차마 같이 때리라는 말씀은 하지 못하시고, 차라리 도망이라도 가라고 가르치셨지만 나는 매번 맞고 울었고, 어머니는 급기야 그런 나를 태권도 도장에 보내셨다. 최소한 호신술이라도 배워 맞고 울지 말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5살짜리가 무슨 태권도를 배우겠는가. 난 도장에서 가장 어린 아이로 귀여움을 독차지했지만 여전히 놀이터에서는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했었다. 아이들은 키 큰 아이가 우는 게 재미있었던지 나를 계속해서 괴롭혔고,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던 내가 아이들 괴롭힘에서 벗어난 것은 6살 때쯤, 내가 남들보다 키가 크고 힘이 세다는 것을 인지하면서부터였다. 당시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는 막무가내 폭력으로 모든 아이들에게 경외의 대상이 되어 왕처럼 군림하던 세호(가명)란 아이가 있었는데, 어느 날 나는 녀석이 만들어 놓은 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물론 이유는 기억나지 않는다.
당연히 나를 때리려는 세호와 그에 지지 않고 맞섰던 나. 세호는 매번 맞고 울기만 하던 내가 반항하자 흠칫 놀라면서 결국에는 짱돌을 던지기 시작했는데, 난 그 상황에 묘한 쾌감을 느꼈다. 비록 넓적다리에 돌을 맞아 울긴 했지만, 녀석이 치사하게 돌을 들었다는 것은 더 이상 그가 나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뜻이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이후 다른 아이들은 나를 괴롭히지 못했다. 나는 누군가를 먼저 때리지는 않았지만, 아이들이 때리려고 하면 힘으로 먼저 제압했고, 예전처럼 그리 쉽게 울지 않았다. 나는 예전 같았으면 울고 말아버렸을 그 상황에 내가 대처할 수 있다는 것 자체에 대해 자부심을 느꼈고 그 뒤로는 누구와 싸워도 쉽게 지지 않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내 자신에 대해 믿음을 갖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져오고 있다.
만약 그때 부모님이 아이들 싸움에 끼어들어 상황을 정리했더라면, 내가 느꼈던 자부심과 믿음을 얻을 수 있었을까? 아니다. 아마도 나는 꽤 오랜 시간 나보다 센 누군가에게 의지하게 되었을 것이고 스스로에 대한 믿음을 가지는 데에도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다. 아이들 세계는 아이들 것이고, 그 속에서 아이들은 스스로 성장해 간다. 내가 그랬듯이.
이런 생각을 하게 되니 더 이상 산들이에게 감 놔라 대추 놔라 할 수 없었다. 폭력은 분명 나쁜 거지만, 어쩌면 6살 남자 아이들에게 폭력은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세상과 대화하는 방법이고, 타인과 관계를 맺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 나름대로의 서열 짓기를 위한 통과의례일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물론 폭력의 정도가 심하다면야 당연히 개입해야겠지만, 그것이 아주 심각한 상황이 아니라면 부모로서 지켜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그 모든 것을 극복해 내는 것은 오롯이 산들이의 몫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녀석이 나의 바람대로 그것을 이겨내면 더 큰 것을 얻을 것이고, 좀 더 커서 친구들과 관계를 맺을 때에도 자신감을 가지게 될 것이다. 부모로서 그보다 기쁜 것이 어디 있겠는가.
그래서 오늘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