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애와 작은애 어렸을 때 모습-아토피 징후라고는 전혀 없었다.
정성화
아내는 답답한 마음에 큰애가 아토피가 없던 시절, 비만이 심하지 않던 시절에 찍은 사진들을 우리가 공동으로 사용하는 대화방에 올려놨다. 사진을 보며, 현재와 비교해보고 좀 각성하라는 의미인 것 같다. 위의 사진은 그중의 하나로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정도로 귀여웠던 어린 시절의 모습이다.
아무튼 한국에 들어오니까 그 동안 아프던 것이 견딜만해졌고, 그래서 다른 생각이 났을 것이다. 약을 먹으면 곧 나아지겠지 하는 낙관적인 생각을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많이 아프다가 막상 병원에 가면 통증이 덜 해졌던 경험이 있다. 결국 우리는 대전에서 기다리고, 큰애는 서울에서 동생하고 놀다가 막차를 타고 오는 것으로 최종 타협을 봤다.
'그동안 한국생활, 한국에서 누렸던 재미있었던 것들이 많이 그리웠겠지. 어쩌면 호주에서 보낸 3년이 큰애 기억 속의 한국을 지상낙원처럼 미화시켜 주었는지도 몰라. 힘든 치료에 들어가기에 앞서, 김밥, 치킨 양껏 먹고 콘서트도 보고 하면서 한국생활에 대한 갈증을 먼저 해소시켜 주는 것도 괜찮지.'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하고 나는 대전 유성에 있는 콘도에 방을 잡았다. 바로 집에 들어가기 보다는 밖에서 분위기 전환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가려움을 어떻게 참았을까?큰애는 예상보다 일찍 대전터미널에 나타났다. 동생하고 놀러 가기 전에 피부과 병원에 들렀는데 거기에서 자기들은 치료를 못하니까 대학병원이나 종합병원으로 가라고 했다고 한다. 그것 때문인지 서울에서 오래 놀지 않고 온 것이다.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한다. 터미널 근처에 차를 주차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는데 아내와 함께 걸어 오던 큰애의 처참한 모습을, 그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듯한 느낌으로 포옹을 했을 때 맡았던 지독한 연고 냄새를. 그리고 콘도에서 자고 아침에 일어 났을 때 큰애가 누웠던 자리에 눈처럼 떨어져 쌓여 있던 피부조각들. 무엇보다도 아토피가 주는 고통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고 도리어 미안해하던 표정을.
도대체 내 아이가 왜 저런 고통을 받아야 하는지, 어떻게, 무엇부터 해야 할 지 앞길이 망막했다. 대전에서 밤을 보낸 우리는 일단 순천의 성가를로 병원으로 갔다. 종합병원은 아니지만 순천에서 가장 큰 병원이다.
그러나 여기서도 의사는 큰애를 보자마자 자기는 치료를 못한다고 했다. 우리는 부랴부랴 이곳 저곳 전화를 해서 그중에서 예약이 가능했던 전남대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까지 가는 1시간 30분 정도의 시간 동안, 비로소 사태의 심각성을 인식했는지 큰애는 말이 없었고, 차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내가 자동차를 주차하고 오는 동안 아내가 병원에 접수를 했다. 그런데 한참을 기다려서 만난 대학병원 의사도 자기는 치료를 못하니 교수님에게 진료를 받으라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또 한참을 기다려서 큰애는 비로소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교수님은 큰애에게 강력한 호르몬제를 처방했다고 한다. 절대 오래 먹어서는 안 되는.
나중에 당시의 심경이 어땠는지 큰애에게 물어 보았다.
"아빠가 지금도 이해가 안 되는 것이 아토피가 그렇게 심한데 어떻게 견뎠어? 가려움이란 가장 참기 힘든 고통 중에 하나인데 어떻게 참은 거야? 아빠라면 미쳐 버릴 것 같은데. 인내력은 정말 최고인 것 같다. 그 정도 참을성이면 뭐든지 하겠다." "그 전에는 그 만큼 심하지 않았어. 언제부터인가 늘 아토피가 있었고, 그러다 보니 고통에 적응한 것인지 무감각해진 것인지 나도 모르겠어. 지금 생각해보니 어떻게 참았나 싶긴 하네. 아무튼 심하긴 했는데 그때는 그냥 별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아.""귀국을 결심했을 때 어떤 생각이 들었어?""이젠 도저히 안되겠다. 너무 고통스럽고 정신적으로도 지쳐 있었어. 그래서 그냥 한국에 가서 치료받고 와도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을 하고 결심한 거야.""공항에 내렸을 때는 기분이 어땠어?"이제 해방이다. 이런 느낌이었어. 그냥 한국에 왔다는 것만으로도 즐거웠어"내가 큰애에게 가하는 압박이 그렇게 과중한 것이었나? 마냥 표류하고 있는데 그냥 지켜보고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뭔가 사회에 기여하면서, 자신의 생활은 스스로 꾸려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길러줘야 하지 않은가. 지금 내 사고의 범위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로 여겨지는데, 그게 잘못된 생각인가? 혼란이 왔다. 가치판단의 기준이 흔들리는 것 같았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릿속은 복잡하고, 앞날은 불확실 했지만 우리 생활은 갑자기 활기를 보이게 됐다. 아이들을 모두 떠나 보내고 고즈넉했던 아내와 나의 생활에 변화가 생긴 것이다. 조용한 집안에서 사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아토피 치료에 필요한 교과서적인 생활을 압박하는 우리 부부와 그 동안 누리지 못했던 즐거움을 보상 받으려는 큰애와의 씨름이 아침부터 밤까지 이어졌다.
아토피 치료에 필수적인 충분한 수면시간 확보를 위해 일찍 샤워를 하고 잠자리에 들게 하고, 식사를 건강식으로 챙기고, 체력을 기르기 위해 최대한 운동을 하게 하려는 우리 부부에 대해 큰애는 나름의 방식으로 저항을 해 왔다.
잠자는 시간을 처음에는 준수하다가 5분 10분 점점 잠자리에 드는 시간을 늦춰갔다. 아침은 집에서 먹지만 점심은 도서관을 핑계로 밖에 나간 후 호주에서 먹고 싶었던 것을 찾아 먹었다. 운동도 아주 안 하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흡족할 정도로 하는 것은 아니어서 항상 잔소리가 큰애 등 뒤를 따라 다녔다.
아무튼 이러한 과정에서 모처럼 집안에는 다시 생기가 돌았다. 예전에 아이를 키울 때의 즐거움이 다시 한번 느껴졌다. 아이와 같이 있는 것이 그냥 좋았다. 부모는 자식에게 뭘 해줄 수 있을 때 행복한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