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에게로 갑자기 빛이 모이는 시간이 있다.
이준수
'관찰하지 않는 당신은 유죄!'
은정이는 무언(無言)으로 나의 죄를 고발하고 있었다.
그녀는 누구인가? 같이 있다가 잠시 사라져도 눈치채는 이가 별로 없는 캐릭터. 몸집이 작고 행동은 조심스러웠다. 목소리는 뻗지 못하고 뒤로 삼키는 듯 했고 먼저 이야기를 꺼내는 경우가 드물었다. 담임에게 질문은 안했지만 노트에 적힌 문장들은 늘 가지런하였다. 농담하면 배시시 웃고 마는 수줍은 친구는 선생에게 참 편한 존재였다. 사고를 치지도 않고, 공부가 쳐지지도 않고, 부모가 극성도 아니고, 교우관계도 그런대로 원만한 학생. 새학기 반편성 할 때 부담 없이 아무 곳에나 배정할 수 있는 아이가 은정이였다. 이 여학생을 오랫동안 잊지 못하게 만든 사건이 있었다.
3월, 4월, 5월... 9월, 10월 그리고 꼬맹들과의 헤어짐이 두려워지는 11월 11일 이었다. '농업인의 날'보다 '빼빼로 데이'로 더 익숙한 그 날에는 과자 포장지가 어디에나 쌓여있었다. 숫자와 생김새가 비슷한 막대과자로 마음을 전하라는 상술에 꼬맹이들 호주머니는 가벼워졌다. 학부모들은 더 심했다. 학급 전체에 간식으로 돌리고 싶다는 분들을 기분 나쁘지 않게 말리는 일도 매년 반복되었다. 이쯤 되면 문화가 되어버린 셈인데 먹기만 하고 넘어가기에 기회가 아까웠다.
추억을 만들기로 했다. 짧은 회의를 통해 뭘 하면 좋을지 아이디어를 받았다. 벽화 경험이 있는 수민이가 협동화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기왕이면 종이 말고 캔버스에 작업하자고 했다. 아무도 캔버스 경험이 없었다. 호응이 괜찮았다. 미술관에서만 보던 하얗고 고운 천을 만져본다는 상상만으로도 분위기는 달아올랐다.
만화 캐릭터 좀 그리는 진수는 스펀지밥 징징이를 표현할 테니 맡겨달라고 했고, 투니버스 채널 마니아 가영이는 거대 도라에몽을 담아내겠다고 했다. 거들기 좋아하는 지민이와 상훈이가 자기도 미술학원 다녀봤다고 추임새를 넣는다. 용기백배! 이대로라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뺨이라도 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첫 단계는 젯소 바르기. 젯소는 유화나 아크릴 채색을 하기 전 표면에 바르는 재료인데 색을 보존하는 역할을 한다. 꿀렁꿀렁. 점도가 있는 흰 색 액체가 접시에 부어지는 순간 교실에는 환호성이 울렸다. 물감 같기도 하고 페인트 같기도 한 신기한 물질의 등장에 터져나온 탄성이었다. 꼬마 예술가들은 차례를 지켜 붓질을 개시했다. 가로 방향으로 한 번, 세로 방향으로 한 번. 누르는 힘과 바르는 양이 들쭉날쭉 이었다. 옷에는 하얀 얼룩이 지고 손에는 뻑뻑한 석고가루가 묻었다. 예상만큼 쉽지 않았다. 잠깐 말리고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가로 방향으로 두 번, 세로 방향으로 두 번.
진행 속도가 더뎌졌다. 이탈자가 생기기 시작했다. 화장실에 다녀온다던 까불이 윤서와 건우는 20분째 부재중이다. 피카소도 감탄할 처음의 용기는 끈적거리는 젯소처럼 두려움이 되어 11살 어린이들의 마음에 들러붙었다. 마침내 스케치할 준비가 끝났다. 그림을 다 그린 기분이었다. 막막했다. 현대 추상화의 이해로 주제를 바꿔서 '순수'라는 제목으로 종료해 버릴까? 그 누구도 선뜻 나서지 않았다. 웅크리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