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그때 그사람들>의 한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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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처분은 서막에 불과했다. 영화 개봉 후 보름이 지났을 무렵, 박씨는 영화사를 상대로 상영금지 및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정식으로 제기한다. 박씨는 영화가 허위 내용을 사실적으로 표현하여 고인과 유족의 명예, 프라이버시권을 침해하고 유족의 고인에 대한 경애, 추모의 정 등 인격권을 침해하였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위자료 5억 원 지급과 함께 영화 상영과 배포 금지를 청구했다.
박씨가 특히 문제삼은 장면은 극중 '각하'가 여성편력을 드러내거나 일본어를 사용하거나 일본문화에 향수를 갖는 장면, 사망 당시의 상황과 대화 장면이다.
영화사 측은 "영화는 어디까지나 허구이므로 인격권을 침해할 여지가 없고, 설사 침해했더라도 표현의 자유와 공공의 이익을 위해 영화상영이 보장돼야 한다"고 맞섰다.
법원의 판단은 어땠을까. 2006년 1심 법원(서울중앙지법 제63민사부 부장 조경란)은 어느 한쪽의 손을 번쩍 들어주지는 않았다. 결론은 일종의 절충안에 가까웠다. 하지만 판결 이유를 보면 영화의 상상력을 그다지 존중해주지 못했다는 비판을 피하기 어렵다.
우선 일반론부터 살펴보자. 사람의 명예, 신용 등 인격적 가치는 헌법으로부터 나오는 기본권이기 때문에 절대적이고 배타적인 권리를 갖는다. 따라서 인격권 침해를 당한 사람은 침해행위 금지와 함께 손해배상을 청구할 수 있다. 사자(死者)는 유족이 대신 청구할 수 있다.
1심, 인격권 침해인정하면서도 상영가능 판결법원은 "영화가 고인의 인격적 법익을 침해하였다고 하려면 관객이 실제 사건을 연상할 수 있음이 전제되어야 한다"면서 "영화는 도입부에서 고인의 이름을 직접 언급하면서 실제 사건과 매우 유사하게 구성되어 있으므로 관객의 입장에서 극 중 '각하'가 곧 고인을 특정한 것임을 쉽게 인식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내용 면에서는 "여러 장면이 간접적이고 우회적으로 비유하거나, 상징적인 표현을 사용함으로써 고인의 사회적 평가를 저하시키는 등 고인의 인격권을 침해하였다"고 판단하였다. 예를 들어 각하가 여색을 탐하고, 일본 문화에 향수를 갖고 있으며, 측근들과 일본어로 대화하고, 금고에서 돈을 꺼내어 쓰는 장면들은 "영화 전체적인 구성으로 보아 합리적인 관객이라도 각하의 모습을 실제 고인의 모습으로 인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고 판시했다.
특히 김 부장이 각하에게 총을 겨누며 일본어로 "다카키 마사오, 누구라도 죽으면 그냥 썩은 내 피우는 쓰레기인 거요"라고 말하는 장면도 문제 삼았다. "고인의 죽음을 부패하여 더러운 쓰레기에 비유하여 대중 앞에 공표함으로써, 역사적 평가를 떠나 한 인간으로서 당연히 보장받아야 할 인격적 법익 즉, 생존시 또는 사후에 자신의 죽음의 가치와 그 경건성에 대해 갖는 기대라는 인격적 법익을 침해하였다"는 것이다.
이쯤 되면 영화상영 자체가 위태로울 지경이었다. 하지만 법원은 일부 장면만을 금지하면 영화가 갖는 창작의 본질이 껍데기만 남을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그러면서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고인의 인격권 침해가 영화의 상영을 금지할 정도로 중대, 명백하지는 않다"고 한다.
법원은 ▲ 고인이 현대사에서 차지하는 비중 ▲ 10.26 사건은 역사적 의미를 갖는 공적인 사항이고 ▲ 영화의 특수성으로 합리적인 관객이라면 허구라는 점을 인식하고 있는 점 ▲ 이 영화는 어디까지나 상업영화일 뿐이라는 특수성을 감안하면 상영금지는 과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1심 법원은 영화를 상영하되, 위자료 1억 원을 지급하는 것으로 결론을 내린다. 법원은 위자료는 박씨가 이 영화 때문에 '고인에 대한 추모의 정'이 침해됨으로써 입은 정신적 손해를 위로하기 위한 돈이라고 했다.
양쪽 모두 만족할 수 없는 판결이었다. 영화사로서는 추모의 정과 인격권을 침해했다는 불명예와 함께 금전 배상을 하게 됐고, 박씨로서는 영화상영을 막지 못한 점이 큰 불만이었다.
항소심, 절충안 끝에 우여곡절 끝 상영 항소심인 서울고법은 양측을 조정 테이블에 앉힌다. 그리고 절충안을 이끌어낸다. 박씨는 금전청구는 하지 않는 대신 "상상력에 기초한 이 영화의 내용으로 말미암아 영화 속 등장인물과 연관된 분들과 그 가족들에게 본의 아니게 상처를 준 점에 대해 유감을 표명한다"는 유감 표명을 공개하는 것을 받아들인다. 영화사는 도입부 자막 내용을 다음과 같이 바꾸면서 삭제장면 없이 상영하기로 한다.
"이 영화는 역사의 한 사건을 모티브로 한 상상력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세부사항과 등장인물의 심리묘사는 모두 픽션입니다."
이로써 소송은 종결됐다. 이때가 2008년 2월이니 블랙코미디 영화 한 편 때문에 박씨와 영화사는 3년간 송사에 매달린 셈이다. 이 사건을 한 마디로 "웃자고 만든 영화에 죽자고 달려들었다"고 표현하면 과장일까.
[판결 2] '684부대' 훈련병들 다룬 <실미도>2003년에 개봉한 영화 <실미도>는 최초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우리 영화사에 손꼽히는 흥행기록을 남겼다. 영화는 북파공작원 문제를 정면으로 다룸으로써 현대사의 잊혀진 비극을 수면 위로 떠오르게 했다.
그런데 <실미도>가 흥행에 성공하자 뜻하지 않은 문제가 불거졌다. 영화에 등장하는 '684부대' 훈련병들의 유가족이 영화 실미도 제작사와 감독을 상대로 소송을 낸 것이다.
유족들이 주장과 요구는 크게 2가지였다. 첫째, 영화에서 684부대 훈련병 전원을 살인범, 사형수 등 사회 낙오자로 묘사하고 있는 부분은 사실과 다르니 삭제해야 한다. 둘째, 영화가 마치 진실인 것처럼 홍보해 유족들의 명예가 훼손됐으니 유족별로 1억 원씩을 지급해야 한다.
2004년 말에 시작된 소송은 2010년 7월 대법원 판결로 끝이 났다. 재판 결과는 1심부터 3심까지 원고 패소. 유족들의 완패로 돌아갔다. 법원의 판단 근거는 대법원 판결에 자세히 나와있다.
684부대 유족들 "훈련병이 낙오자? 사실과 다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