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7일 경비노동자 분신사고가 일어난 아파트의 한 경비원이 근무를 서고 있는 모습.
이희훈
'주민께 용서를 빕니다. 아무 잘못 없이 폭력을 당하고 보니 머리가 아파 도저히 살 수가 없어 이런 결정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무 잘못이 없는 나에게 경비가 무엇 하는 경비냐는 말과 폭력을 당하고 보니 내가 왜 그런 폭력을 당해야만 하는지 머리가 돌 지경입니다. 언어폭력과 폭행을 당해본 본인은 어디 가서 하소연합니까. 주민 여러분, 내 잘못이 있다면 나를 용서하시고 아파트 경비가 언어폭력과 폭행당하지 않게 해주세요.'
2010년 10월 창원시 어느 아파트에서 아파트 경비원 서현명(가명, 66) 씨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는 2통의 유서를 남겼는데 한 통은 이런 내용이었다. 서씨는 대체 무슨 일을 당한 걸까? 참극이 있기 1주일 전이다.
"야이, 씨X. 경비가 뭐하는 기고, 니가 하는 게 뭐 있나?" 아파트 주민인 50대 남성 오만규(가명)씨가 다짜고짜 서씨에게 험한 욕설을 퍼부었다. 그래도 분이 안 풀렸는지 오씨는 급기야 손으로 서씨의 가슴을 치고, 다시 멱살을 잡고 경비실로 끌고 갔다. 오씨는 계속해서 "경비가 뭐하노" 하면서 연신 주먹질을 해댔다. 그러고선 멱살을 잡고 관리소장에게 끌고 갔다.
무슨 이유로 50대 주민이 60대 경비원에게 손찌검을 하고 수모를 주는 걸까. 이유는 어이없을 정도로 단순했다. 아파트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는데도 경비원이 말리지 않아서였다. 서씨는 평소에도 아이들이 떠들 때마다 애먼 경비원들을 닦달했다.
아파트 주민 앞에서 항상 '을'일 수밖에 없는 서씨에겐 별다른 대응방법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당하며 분을 삭일뿐이었다. 그전부터 오씨의 폭력이 두려워 근무지를 옮겨달라고 여러 차례 관리소장을 찾아갔지만 안 된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병원치료까지 받은 서씨는 몸의 상처보다도 마음의 상처가 너무 깊었다. 화를 풀 곳도,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
서씨를 비롯한 경비원들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급여를 받고 경비 업무 말고도 다양한 '잡무'를 한다. 그러면서도 주민들로부터 민원이 제기되면 해고 위험이 따르기 때문에 주민들의 무리한 요구를 거절할 수 없고, 불만이 있어도 어디에 호소할 수도 없었다. 서씨도 마찬가지였다. 자신보다 나이가 적은 오씨에게 욕설과 폭행을 당했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결국 서씨는 유서를 남긴 채 아파트 옥상에 올라 생을 마감한다.
법원 "폭행과 자살 간 상당인과관계 없다"서씨가 죽음을 택한 뒤에야 법은 뒤늦게 개입한다. 오씨는 사실상 서씨의 죽음에 결정적인 원인을 제공했다. 그렇다면 살인이나 상해치사, 폭행치사죄가 적용될 수 있을까. 현행법과 판례론 어렵다. 오씨의 폭행과 자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가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쉽게 얘기해서 어떤 행위(폭행)를 했을 때 일반적인 경험에 비추어 그에 따른 결과(자살)가 나올 것으로 인정될 경우에만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뜻이다.
오씨는 서씨에게 폭력을 행사한 사실, 즉 상해죄로만 기소되었다. 1심 법원(창원지법 마산지원 김희수 판사)은 유죄를 인정, 오씨에게 징역 6월에 집행유예 2년과 사회봉사 40시간을 선고했다. 법원은 "오씨가 범행을 부인하며 진심으로 반성하고 있지 않아 죄질이 불량하고, 폭행 사건 이후 서씨가 자살까지 하게 된 점에 비추어 엄히 처벌해야 한다"면서도 상해 정도가 가볍다며 실형 대신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그럼에도 오씨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변호사를 통해 상소했다. 하지만 2심도 3심도 "1심의 형이 부당하지 않다"고 판결했다. 사건이 발생한 지 2년 반 만에 오씨는 유죄가 확정되었다. 인정된 죄명은 상해, 형량은 징역형의 집행유예였다. 서씨와 유족들의 고통에 비하면 결코 무겁다고 할 수 없다. 법이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을까.
서씨의 유족들은 민사소송도 제기했다. 오씨를 다시 법정에 세워 안타까운 죽음의 책임을 추궁하기 위해서였다. 유족들은 "오씨가 그동안 폭행과 모멸감을 주는 언행을 함으로써 자살하게 된 것"이라며 위자료를 청구했다.
1심 법원(창원지법 제5민사부 재판장 노갑식)은 오씨의 폭언과 폭행 때문에 서씨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여 자살에 이르게 된 점은 인정했다. 하지만 역시 폭력과 자살 사이에 '상당인과관계'는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법원은 "오씨가 평소 별다른 근무상 잘못이 없는 서씨에게 잦은 항의를 해왔고, 육체적, 정신적 고통을 줌으로써 서씨뿐만 아니라 유족들에게 상당한 정신적 고통을 주었다"며 정신적 손해(위자료)를 배상할 책임이 있다고 판시했다. 민사재판에서 법원은 서씨의 사망에 대해서 오씨에게 직접적인 잘못이 있다고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결국 오씨의 폭행 등이 원인이 되어 고인이 자살에 이르게 되었다"며 사망의 책임을 일부 인정했다.
법원은 원고일부승소 판결을 내렸다. 유족들의 정신적 고통에 따른 위자료 액수는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오씨의 항소로 2심(부산고법)까지 간 사건은 재판부가 제시한 조정안을 양쪽이 수용하면서 끝이 났다.
재판결과 아파트 경비로 일하며 부당한 대우를 받으면서도 하소연도 못한 채 쓸쓸하게 세상을 떠난 서씨의 억울한 심정을 달래줄 수 있었을까. 서씨는 어쩌면 돈보다 오씨의 진심어린 반성과 사과를 원했을지도 모른다. 서씨가 남긴 다른 한 통의 유서는 자식들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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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딸 내 말 잘 듣고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도록 하라. 세상을 살다보면 좋은 일 나쁜 일 많다. 아빠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다 해도 모든 것을 용서하고 살아라. 아빠가 언어폭력과 폭력을 당해 머리가 아파 살 수가 없다. 경비가 무엇 하는 경비냐는 말이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구나. 내 머리가 터지기 전에 먼저 저리 가고 싶구나. 마지막 엄마 잘 모시고 잘 살기 바란다.'서씨의 죽음 이후에도 아파트 입주민들의 '갑질'과 폭력은 멈추지 않았다. 그 뒤에도 비슷한 사건은 또 발생했다. 2014년 10월 서울 압구정동 한 아파트에서 50대 경비원 이아무개 씨가 자신의 몸에 불을 기름을 붓고 분신을 기도한 것이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한 달 만에 숨졌다.
그는 유서에 "여보 날 찾지 마요, 먼저 세상 떠나요, 아들들 미안"이라고 적었다. 유족과 동료들은 일부 주민의 지속적인 언어폭력과 멸시가 자살의 원인이라고 분개했다. 하지만 누구 하나 책임을 지는 사람은 없었다. 돈이 사람을 지배하는 천박한 세상이 만든 죽음 앞에 법은 무력할 뿐이었다.
[판결②] 학교폭력으로 자살, 법적 책임은 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