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2년 10월에 청나라로 간 연행단의 수행원들.
명지대학교 한국사진사 연구소 제공
이 논문에 따르면, 조선은 청나라로 외교 사절단을 매년 보냈다. 그 사절단을 '연행사(燕行使)'라고 불렀다. 1862년(철종 13년) 음력10월 연행단이 중국을 향해 떠났다. 그들은 5개월여에 걸친 기간 동안 외교 업무를 보고 조선으로 돌아오기 전에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일행 중 제일 고령이기도 하고 또 연행단의 정사였던 이의익(李義翊)이 독사진을 찍고 그 외의 수행원들도 모여서 촬영을 했다. 그때 찍은 사진들이 현재 런던대에 보관되어 있는데, 현재 전해 내려오는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 사람을 모델로 해서 찍은 최초의 사진들이다.
조선시대에는 1000호 이상의 군을 도호부로 지정했다. 조선 중기까지 전국에 45개의 도호부가 있었고 강화도 그 중 하나였다. 1627년 1월에 청나라가 쳐들어 왔을 때 인조는 강화로 몸을 피했다. 청군은 빤히 건너다보이는 강화도를 침공할 수 없어 몇 달간 애를 태웠다. 청과 화의를 한 후 도성으로 돌아온 인조는 보장지처(보호를 받을수 있는 곳)로서 강화도의 중요성을 인식했다. 그래서 도호부였던 강화를 유수부로 승격시켰다.
1627년에서 1895년(고종 32년)까지 총 237명의 유수가 강화에 부임해왔다. 이의익은 204대 강화 유수였다. 그는 강화 유수직을 수행하고 도성으로 돌아간 후 몇 년 뒤 연행단의 정사가 되어 중국의 연경에 갔다. 그리고 일을 다 마친 뒤 러시아 사람이 운영하는 사진관에 가서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이 바로 우리나라 사람을 모델로 한 최초의 사진이다.
우리나라에서 사진이라는 용어는 초상화와 같은 개념으로 쓰였다. 인물의 얼굴을 그린 초상화를 진영(眞影), 곧 사진이라고 불렀는데 서양에서 원래와 똑같이 그린 그림(photograpy)이 들어오자 그것에 사진(寫眞)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불렀다. 물체를 있는 그대로 똑같이 그리되(寫) 내면의 정신도 담아야 한다는(眞) 뜻이 이 용어에 담겨 있다.
사진에 담긴 강화도는 지금도 계속'사진'이란 용어는 고려의 대문장가였던 이규보(1168~1241)가 쓴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이란 문집에서 볼 수 있다. 동국이상국집의 제19권에 '달마대사찬(達磨大師讚)'이라는 시가 실려 있는데, 이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중략) 전할 것은 마음이요(可傳者心兮) 쓸데없는 것은 몸이라(無用者身) 몸이 이미 떠났거늘(身已去矣) 어찌 반드시 상을 그려야 하나(何必寫眞) 상을 그려 마음을 구하는 것은(寫眞求心) 뱀 허물에서 구슬을 구하는 격일세(若尋蛇蛻而索珠) 몸이건 상이건(曰身曰眞) 어느 것은 있고 어느 것은 없으리(孰有孰無) 몸이 꿈속의 물건이라면(身是夢中物) 상은 꿈속의 꿈일세(眞爲夢中夢) (중략)몸은 꿈 속의 물건이고 상은 꿈 속의 꿈이라고 한 이 시 속에 '사진(寫眞, 진한 파랑 부분)'이란 용어가 들어가 있다.
이규보는 23살에 과거에 합격했으나, 정식 관료가 된 것은 합격한 지 18년이나 지난 41세 때였다. 그가 왕과 권력자들의 신임을 받고 활발히 활동했던 시기는 고려가 강화도로 수도를 옮겼던 시기와 비슷하다. 그가 남긴 많은 저작물 역시 강화도 시절에 쓴 것이 많다.
<심행일기>라는 책 속에 한 줄 쓰여 있는 '사진'에 대해 알아나가다 보니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풍경을 담은 사진 중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촬영 장소가 강화도였다는 점이다.
1871년 6월에 미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를 침략했다. 신미년에 일어난 서양 오랑캐의 침입이라 해서 '신미양요'라고 부르는 전쟁이 바로 이것이다. 이때 미군 전속 종군 사진사가 50여 장의 사진을 남겼는데, 이 사진들 속에 초지진과 광성보 등이 담겨 있다. 군함에서 바라본 강화도의 모습도 있고 또 상륙해서 찍은 사진들도 있다. 그들은 의도하지 않았지만 이 사진들은 우리나라를 찍은 최초의 사진이 됐다.
강화도 역사, 계속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