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일수호조규(강화도 조약)를 맺을 때 접견 대관이었던 신헌.
강화역사문화연구소
그때 접견 대관을 맡은 사람이 바로 신헌이다. 신헌은 병조판서, 총융사, 훈련대장, 어영대장 등의 국방 요직을 두루 역임한 무장이었다. 그는 고종 초기에도 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형조·공조판서를 역임하기도 했다.
또한 1874년(고종11년)에는 진무사 겸 강화유수에 제수되기도 했으니 강화도와도 인연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무장(武將)이었지만 서예와 문장에 능해서 당시 사람들은 그를 일러 '유장(儒將)'이라고 불렀다.
그는 두 해 전에 떠났던 강화도를 향해 걸었다. 이번에는 접견 대관으로 가는 길이다. 비록 강화가 서울에서 하루 만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해도 연로한 그에게는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을 테다. 그때 신헌의 나이가 75세였으니 자리에 연연할 나이도 아니었다.
아무리 문무에 모두 능한 사람이었다고 해도, 외교 업무는 무관보다는 전문 문관이 적임자일 것이다. 그런데도 무장이었던 신헌에게 그 일을 맡겼다. 그의 어떤 점이 눈에 띄어 강화도 조약의 책임자를 맡게 된 것일까.
개화파, 척화파 모두의 신임을 받았던 신헌신헌이 강화도 조약의 책임자가 된 데는 박규수의 천거가 있었다. 박규수는 연행사(燕行使)로 청나라를 다녀오면서 변화하는 국제 정세를 목격했다. 그의 문하에서 김옥균, 박영효, 유길준, 홍영식 등의 초기 개화파들이 성장했으니 그는 개화운동의 씨를 뿌린 사람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박규수가 신헌을 협상의 적임자로 천거했던 것은 신헌이 외국을 무조건 배척해야 한다는 척화론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헌은 여러 차례 청나라로 연행을 다녀오면서 급변하고 있는 국제 정세에 대해서 감지하고 있었다. 그런 사실을 알고 있던 박규수가 신헌을 천거했다.
신헌은 완고한 척화파였던 흥선대원군에게도 신임을 얻고 있었다. 당시는 안동 김씨가 득세를 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지지 기반을 얻기 어려웠던 대원군은 무관의 지위를 높여주고 등용해서 자신의 세력 기반으로 삼고자 했다. 또 신헌의 스승이었던 추사 김정희는 대원군과 먼 친척관계였다. 추사로부터 묵란 치는 법 등을 배우기도 했던 대원군은 자신의 지지 세력을 키우기 위해 신헌을 추천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까닭으로 신헌은 양쪽 모두로부터 지지와 신임을 받아 강화도 조약의 전권 대관으로 천거가 되었다. 신헌은 왕의 신임까지도 받고 있었다. 왕은 그에게 비지(批旨)를 내렸다.
"경은 문무의 재주를 겸비해서 일찍부터 중한 명망을 드러냈다. 그러므로 조정의 논의가 모두 이 사람이 아니면 안 된다고 하였고, 음기응변을 위해서는 전담을 맡기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에 비록 국경을 나서는 것은 아니지만 고례를 원용해서 참조했던 것이다. (중략) 나는 공을 장성(長城)과 같이 믿으니 경은 반드시 나의 지극한 뜻을 체행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