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구안 서쪽에서 동피랑 벽화마을을 멀리 바라본 모습.
김영동
강구안 바다에는 경계가 없다. 그리고 한 쪽이 더 높지도 다른 쪽이 더 낮지도 않은 평평한 물결이 잔잔히 인다. 그래서 그 바다를 보고 있노라면 차별, 억압 따위의 단어들은 생각나지 않는다. 대신 평화로운 바다가 생의 영감들을 자극한다.
그래서 강구안의 부드러운 울림은 많은 예술가들을 이 곳에서 나고 자라게 했다.
시인 유치환은 그가 살던 문화유치원 사택에서 그리움으로 슬그머니 바다로 걸어나오면 곧 강구안과 마주하게 된다. 이상향을 바라 보며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치던 <깃발>도 그 강구안 항구에 퍼덕였을 것이다. 시인 김춘수도 동피랑에서 남망산으로 가는 길목의 자신이 살던 집 문을 밀고 나오면 바로 앞에 펼쳐져 있는 강구안을 늘 볼 수밖에 없다. 온화한 물결의 '잊혀지지 않는 눈짓'을 곱씹어 보며 그는 존재하는 것들에 대한 의미를 담아 <꽃>을 썼을 것이다.
소설가 박경리는 자신이 태어난 서피랑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강구안의 모습을 <김약국의 딸들>에서 묘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몇 해 전 이 강구안에서 우리는 선생의 장례를 치르고 떠나보냈었다. 독일에서 활동한 작곡가 윤이상은 고향 바다가 자신의 뇌리에 음표를 심어주었노라고 얘기했었다. 그 바다를 잊지 못해 강구안을 껴안은 통영의 큰 사진을 돌아가실 때까지 집에 걸어두었다.
시조시인 김상옥은 남망산 아래와 동충을 오가는 나룻배를 몰던 친구가 있었다. 강구안 끝에서 큰 바다로 갈라지는 그 사이 물길을 헤집다가 멀리 시집간 누님을 그리워하며 <봉선화>를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정신적, 육체적, 경제적 고통을 겪어오던 화가 이중섭도 한국전쟁을 피해 통영에 머물던 2년여 동안 강구안을 보며 바다를 음미했다. 풍경화를 별로 그리지 않았던 그였지만 통영 바다를 보면서는 붓을 들지 않을 수 없어 통영의 여기저기를 그림으로 담아내었다. 그의 대표작 <소> 그림들도 통영 시절에 그린 것이다. 지금도 강구안에는 이중섭이 그린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이 남망산 오르는 길이 보이는 풍경을 보며 서 있다.
통영 사람들 안에 예술의 DNA가 흐르고 있다그러나 강구안의 미풍이 예인들에게만 영감을 준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박경리 선생의 말처럼 통영 사람들 안에 예술의 DNA(디엔에이, 유전자)가 흐르고 있다.
이중섭이 통영의 뱃사람이었다면 그랬을 법한 모습 하나를 나는 아직 기억한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강구안은 어릴적 나의 항남동 집에서 작은 언덕 하나를 넘으면 되는 곳에 있다. 갈매기가 새우깡 대신 동전처럼 굴러다니는 멸치를 집어먹는 바다는 자연스런 놀이터였다. 갱물(바닷물의 사투리)이 땅에 불쑥 다가와 있는 곳이라 친구들과 골목에서 축구를 하고 놀다보면 공이 바닷물에 빠지곤 했다.
그 날도 축구처럼('바보'를 통영 사투리로 '축구'라고 한다) 공을 놓치는 바람에 어선들이 정박해 있던 바다에 골인되었다. 해류에 밀려가는 공과의 생이별이 원통해 우리는 허망한 눈으로 바다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때 어떤 배 위에서 한 선원 아저씨가 뜰채를 내리더니 생선을 낚듯 공을 떠올려 우리에게 던져주셨다.
고맙다고 인사하며 돌아서는데 그 배를 얼핏 보니 뭔가 빛을 달리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우리를 향해 빙긋 웃은 다음에 배의 앞쪽에 우뚝한 조타실 벽면에 그림 그리던 작업을 다시 이어갔다. 지금 떠올려보면 그 그림은 이중섭이 즐겨 그렸던 것과 비슷하게 물고기와 아이들이 춤추듯 뒤엉켜 있는 바탕에 파랗고 빨갛고 노랗게 채색된 것이었다.
풍어의 꿈을 가진 아빠의 소망이 담겼을 수도 있고 바다를 벗삼아 살아온 자신의 추억이 담겼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 배는 남달랐다. 그냥 똑같이 페인트 칠 해진 배들 사이에서 오롯하게 떠 있는 자태가 이 곳 미항에 가장 어울렸다. 그래서 그 후로도 강구안을 거닐 때는 그 배에 유독 눈길이 갔고 완성되어가는 그림을 보며 그 아저씨의 꿈도 그러했으면 하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