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장군의 위패가 있는 통영충렬사 입구
김영동
통영 충렬사는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기 위해 왕의 명으로 1606년에 만들어진 곳이다.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 속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충무공 관련 사당이기도 하다.
대통령 출마자나 당선자들이 오늘날 현충원을 맨 먼저 참배하듯, 광복 직후 통영 충렬사는 독립운동에 헌신했던 김구, 여운형 등 많은 지사들이 새로운 사회를 만들겠다는 다짐을 하러 찾았던 곳이기도 했다. 건축미 면에서도 단아한 아름다움이 있어, 충렬사 외삼문이 정부 수립 후 발행된 우표의 도안으로 쓰이기도 했다.
나는 통영 충렬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서문고개 근방의 할아버지 집에서 태어났다. 지금은 충렬사 주차장이 된 곳의 바로 뒤편 여황산 자락이 어린 시절 할아버지 댁에 올 때마다 헤집고 다니던 천연의 놀이터였다.
맑은 상류이던 그 시절의 나는 아무렇게나 뻗은 산길을 흘러 다니며 올챙이를 품고 다녔다. 바다로 향할 운명 따위는 몰라도 됐다. 야산의 '드림파크'를 헤집고 온 날이면 개근상장에 찍힌 도장처럼 빨갛게 몸 여기저기에 상처가 나 있기도 했다. 그러면 할머니는 노란 기름에 무슨 가루를 타서 긁혀 피 나는 곳에 발라주었다. 동백꽃으로 만든 기름과 가루라는데, 은은한 그 내음을 맡으며 잠이 들기도 했다.
여황산 산자락은 동네 꼬마들과 무공을 겨루던 격전지이기도 했다. 아이들은 저마다 위인전집이나 영웅 만화에 나오는 인물로 빙의해서 전투에 임했다. 격전 중 최대의 논쟁은 그 인물들 중 누가 제일 강한가였다. 도시의 이름부터 이순신 장군의 호를 따 충무시라고 부르던 이 고장은 이순신의 도시였기에 이순신 장군이 제일 세다는 것이 중론이었다. 하지만, 광개토대왕이 더 싸움을 잘한다는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이순신은 장군인데 반해 광개토는 왕이니 더 낫다는 논리였다.
장군이던 사람이 왕처럼 대통령을 하기도 했다는 걸 그때 그 아이들이 알았더라면 어땠을까. 그것도 광개토대왕이 통치했던 22년과 필적할 만한 기간인 18년이나 그랬다.
박정희 대통령은 이순신 장군을 신격화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광화문에 거대한 동상을 세우고 장군의 탄신일을 국경일로 지정하는 것을 추진했으며 현충사 성역화 작업을 진행했다.
군인 대통령 연정의 시대 끝무렵이었던 때, 내가 다녔던 초등학교에서도 충무공의 정신을 강조했다. 조회 시간에 교장 선생님 훈화 말씀은 기-승-전-이순신이었다. 학교 곳곳엔 이순신 장군의 초상화와 해상 전투를 묘사한 그림, 어록들이 붙어 있었다.
해전도에는 파도가 휘몰아치고 있었고, 소리 없는 아우성이 병사들의 날선 눈에서 흘러나오는 듯했다. 위태롭게 떠 있는 배 위에 선 이순신 장군과 병사들의 모습을 나름 용맹하게 보이려 그린 것일 텐데, 나의 눈에는 죽음과 싸워야 하는 외롭고 아픈 사람들이 느껴졌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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