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법 타결 소식은 들리지 않고...여야가 약속한 세월호특별법 처리 시한을 하루 남긴 30일 오후 국회 본청 앞에서 농성중인 세월호 참사 희생자 가족들이 차가운 바닥에 이불로 추위를 버티고 있다. 가족들의 본청 출입을 차단하기 위해 경찰이 출입문 입구를 가로막고 있다.
남소연
텅 빈 광장에서 일상으로 돌아가고 싶어도 돌아갈 수 없는 사람들에게 '제 일상이 바빠서 이제 그만'이라는, '이제 당신들과 내 일상을 나누는 건 쉽지 않아요'라는 말들이 읽혀질까 두렵다. 나의 것이기도 한 말들. 그래서 아프고 부끄럽다. 아프고 부끄러운 건 아마 그 담담하고 평범한 말들에서 냉기를 알아챘기 때문이겠지. 그때, 배가 침몰하던 것을 보던 그때, 난 뜨거운 눈물과 분노에 잠을 이룰 수도 없었는데…. 언제 이리 순식간에 차가워진 걸까.
신자유주의의 놀라운 속도는 상품생산과 소비의 속도만큼 아픔의 기억도, 죽음의 기억도, 분노의 기억도 이렇게 쉽게 속도 경쟁하듯 흘러 보내나보다. 나 자신도 자본주의적 속도에 익숙해진 인간이 되어버린 건 아닐까. 그렇게 달라지자고 했건만 우리도 어느새 모르게 익숙해져버린 그 속도. 그리고 그 속도는 이상한 세상 질서를 유지하게 만든다.
어느새 가족만의 일이 된 세월호 참사세월호에 갇혀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던 목숨들, 그야말로 국가로부터 어떤 도움도 받지 못한 벌거벗었던 삶은 죽어서도 가치 있는 삶으로 대접받지 못했다. 죽음의 진실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아니 수장된 목숨만이 아니라 그/녀들의 가족들도 벌거벗은 채 국가로부터 모욕을 당하며 거리에서 생활하고 있다.
9월 16일 박근혜 대통령이 '순수한 유가족'을 언급하며 세월호 특별법을 포기했을 때, 벌거벗은 삶은 아예 얼어붙게 될 위기에 처했다. '순수'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아무것도 입지 않은, 벌거벗은 삶, 벌거벗은 인간이다. 벌거벗은 삶은 언제나 생명을 부지하기에도 바쁘다.
권력은 벌거벗은 삶을 요리하는 정치를 그동안 해왔고 해갈 것이다. 벌거벗은 삶을 살릴 것인가, 말 것인가는 권력이 정하는 것이 되어왔다. 한 생명이 살고 죽음은 권력의 관심 대상이 아니었다. 아니 권력의 유지가 필요할 때만 관심일 뿐. 그러하기에 '세월호 참사'는 예외적 사건인 동시에 예외가 아니다.
신자유주의 불확실성과 유동성이 언제든 누구에게든 불안과 공포를 만들기에 한국사회에서 언제나 일어날 수 있는 사건이다. 따라서 벌거벗은 삶이 아예 얼어붙게 될 위기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만의 위기가 아닌 셈이다. '순수하라'고 하는 저들의 주문은 가만히 처분을 기다리라는 뜻이다. 또 순수하게 벌거벗은 채 그냥 있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어느새 세월호 참사는 가족만의 일이 된 듯하다. 하지만 세월호 참사의 죽음은 우리 모두의 사건이라던 말들은, 약속들은 저편으로 날아간 듯하다. 언제까지 싸울 것이냐고 묻는 사람들에게 시간을 만들고 채우는 건 우리 몫이듯이 물리적 시간을 만드는 것도 우리라고 말하자. 아니 나에게 말한다.
대통령에게 우리가 분노하고 있음을 알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