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인들의 감독 하에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하는 아프리카인 노예들. 19세기 때 나온, 테오도르 브래이의 석판화.
위키피디아 백과사전 영문판
사탕수수는 연평균 기온이 20도 이상이거나 연평균 강우량이 1200~2000㎜인 지역에서 재배된다. 우리 민족의 영역인 만주나 한반도에서는 이런 기후조건이 등장한 적이 없다. 그래서 우리 민족은 대외무역을 통해 사탕을 수입할 수밖에 없었다.
옛날 한국에서 사탕이 얼마나 귀했는지는 역사기록에서도 확인된다. 조선 세종 때인 1446년에 소헌왕후가 병에 걸렸다. 훗날의 기록인 문종 2년 5월 14일자(양력 1452년 6월 1일자) <문종실록>에 따르면, 소헌왕후의 아들인 세자 이향(훗날의 문종)은 어머니를 열심히 간호했다. 병중의 소헌왕후는 사탕을 맛보고 싶어 했다. 하지만, 문종은 끝내 구하지 못했다. 그런 상태로 소헌왕후는 죽었다.
소헌왕후의 삼년상이 아직 안 끝났을 때였다. 삼년상은 윤달을 제외한 25개월 동안이었다. 어머니를 상실한 슬픔이 아직 가시지 않은 이때, 누군가가 문종에게 사탕을 바쳤다. 사탕을 받고 어머니 생각이 난 문종은 어머니의 혼전(임시 사당)으로 사용되는 창덕궁 휘덕전으로 갔다.
거기서 문종은 어머니의 위패 앞에 사탕을 바치고 눈물을 흘렸다. '왜 이제야 사탕을 구했단 말인가!'하고 애통해 했을 것이다. 이렇게 중국·여진족·오키나와·대마도·일본과 무역이 왕성한 조선의 왕실에서도 구입하기 힘들 정도로, 사탕은 진귀한 상품이었다.
사탕의 희소가치를 보여주는 또 다른 사례가 있다. 조선 제14대 주상 선조는 임진왜란이 발발한 지 17일 만인 선조 25년 4월 30일(양력 1592년 6월 9일) 백성들의 야유를 받으며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도망했다.
그날 저녁, 선조의 일행은 임진강 앞에 당도했다. 강가에 왔지만 곧바로 배를 구하지 못해 오랫동안 대기해야 했다. 급히 피난하는 바람에 음식을 챙기지 못해, 선조는 밤 아홉시가 되도록 저녁식사를 하지 못했다. 허기진 선조는 내시에게 "술과 차라도 가져오라"고 했지만, 그마저도 없었다.
그때, 내의원(왕실 병원)에 근무하는 용운이란 사람이 선조에게 다가갔다. 그는 갓을 벗은 뒤 상투 속에서 사탕을 꺼냈다. 양력 6월에 아침부터 피난하느라 정신이 없었으니, 상투 속의 사탕에는 땀 냄새가 좀 배어 있었을 것이다.
용운은 임진강 강물에 사탕을 씻은 뒤 왕에게 바쳤다. 강물에 씻은 것은 상투 속에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딱딱한 사탕을 허기진 왕에게 곧바로 줄 수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평소 같으면 이런 행동은 불경죄로 처벌받을 수도 있었지만, 상황이 상황이니 만큼 그냥 넘어갔다.
사탕을 먹고 기력을 회복한 선조는 얼마 뒤 임진강을 건넜고, 새벽 1시쯤에야 고대하던 저녁밥을 먹을 수 있었다. 선조 일행 때문에 강을 건너지 못한 백성들은 그 시각에 선조를 저주하고 있었을 것이다.
선조(재위 1567~1608년)와 비슷한 시기에 영국을 통치한 엘리자베스 1세(재위 1558~1603년)는 비교적 풍부하게 사탕(혹은 설탕)을 맛보았다. 당시의 영국은 조선보다 부유하다고 보기 힘든 나라였지만, 영국왕은 조선왕에 비해 풍부하게 사탕을 맛볼 수 있었다. 어찌나 사탕을 많이 먹었던지 그의 이빨은 거의 다 썩었다. "여왕의 치아는 충치로 새까맣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생겼을 정도다.
사탕 대중화 계기는 유럽의 아프리카·아메리카 침략지금까지의 등장인물들이 거의 다 지배층인 데서 느낄 수 있듯이, 사탕의 역사는 오랫동안 주로 지배층의 역사였다. 이것이 유럽에서 대중화된 것은 17세기 이후였다. 그 계기는 유럽의 아프리카·아메리카 침략이었다.
콜럼버스·마젤란 등의 활약에 힘입어 글로벌 침략자로 변신한 유럽인들은 아메리카에서 광대한 사탕수수 농장을 확보하고, 아프리카에서 수많은 노예를 확보했다. 이들은 아프리카에서 확보한 노예들을 아메리카의 사탕수수 농장에 배치했다. 아프리카인들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조건에서 농장 생활을 했는지는 굳이 언급할 필요가 없다.
사탕수수 농사 및 설탕 채취는 대규모 집단노동을 필요로 했다. 유럽인들은 아프리카·아메리카 침략을 통해 이 문제를 해결했다. 산업 부지와 인건비 문제를 거의 공짜로 해결한 것이다. 이렇게, 아메리카인들이 빼앗긴 땅에 아프리카인들이 대거 투입된 상태에서 사탕수수 대량 재배와 설탕의 대량 생산이 이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