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사시간에 학생들에게 ‘한 말씀’ 하는 교장 선생님
김민지
내가 방문한 날은 금요일 저녁이었는데 학생들이 식사 후에 큰 강당에 모여 조별게임을 즐기고 있었다. 테이블마다 맥주병이 놓여진 채로 깔깔깔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우리나라 대학생들 MT의 한 장면 같았다. 교장 선생님에게 "학교에서 술이 허용되느냐"고 묻자 "금요일과 토요일만 허용되는데 하루에 맥주 몇 병까지 가능한지도 학생들끼리 논의해서 정한다"고 했다.
인생학교라는 점에서 이 '성인용 자유학교'는 덴마크의 학생들이 중학교 과정을 졸업하고 고등학교 과정에 들어가기 전에 1년간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인생을 설계하는 '애프터 스쿨'과 닮았다. 그러니까 덴마크는 고등학교 입학 전 1년, 대학교 입학 전 6개월을 이렇게 기숙형 학교에 가서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이고 잘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탐험한다. 직장인이 되어 한 직장에 오래 다니다가 전직을 하고 싶을 때는 또 다른 평생교육기관을 선택해 다시 한 번 자신의 인생항로를 점검한다.
이렇게 중요한 선택 전에 나에게 시간적 여유를 준다는 것, 그래서 내가 내 선택의 주인이 되게 한다는 것, 이것이 덴마크를 행복사회로 만드는 중요 요인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그 정신 또한 그룬트비의 교육철학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세 학생 "그룬트비는 여전히 우리 마음 속에"이런 학교는 먹여주고 재워주는 일까지 하는 기숙학교여서 공짜가 아니다. 정부와 학생이 반반 내는데 이번 학생들은 4만 크로나, 우리나라 돈으로 약 800만 원을 냈다. 그런데 대부분의 학생은 스스로 벌어서 학비를 마련한단다. 부모로부터 자립 훈련을 그렇게 시작한단다. 식사를 마치고 한 테이블에 모여 수다를 떨고 있는 6명의 학생들에게 학비를 부모가 대준 사람이 있냐고 물으니 모두 고개를 저었다.
산업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온 여학생 마리아는 19살인데 "4만 크로나를 벌려고 식당에서 몇 달간 하루 8시간씩 종업원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단다. 개강한 지 3주밖에 안되었지만 마리아는 "우리가 벌써 식구처럼 친구가 되었다"고 만족해했다. 그는 여러 평생교육기관이 있지만 이 학교를 택한 이유를 "그룬트비 정신이 살아있는 학교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룬트비는 여전히 우리 마음에 있다."교장 선생님의 안내로 학교 이곳저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룬트비가 개교식 때 이 학교에 왔냐고 물으니 "아니다. 그룬트비는 당시에 코펜하겐에 살았는데 여기까지 오는 것이 너무 멀어서 오지 못했다"고 했다. 교장 선생님은 나를 다목적홀로 안내했다. 그곳엔 그룬트비의 교육철학을 구현하기 위해 초대 교장이 된 요한 베게너(Johan Wegener)의 초상이 걸려있었다. 베게너 교장은 개교식 때 대부분이 농부였던 학생들에게 이렇게 당부했다고 한다.
"젊은이들은 이곳에서 명료하고 분명하며 올바르게 말하고 생각하고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이 배움은 민족주의적이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이뤄져야 한다. 젊은이들의 심장은 조국의 언어, 조국의 역사, 조국의 전통에 대한 사랑으로 젖어 있어야 한다. 민족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도 알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없으면 소작농은 독립하지 못할 것이다. 그들은 누가 자신의 적인지 알면서도 의지만 할 것이다."'깨어있는 농부' 10%가 나라를 바꿨다한마디로 '깨어있는 농부'가 되라는 것이다. 베게너 교장의 초상화를 보면서 나는 개교식 당시 그와 학생들 사이에 오갔을 눈의 대화를 상상하고 있었다. 현 교장이 설명을 보태준다.
"당시 이 농민학교에는 귀족부농은 오지 않았다. 아주 가난한 농민도 별로 없었다. 주요 학생은 소작농 등 중간층 농민이었다. 여기에 온 학생들은 자기가 사는 마을의 10%에 불과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그룬트비 정신으로 배운 그들이 덴마크라는 나라를 바꿔버렸다."나라를 바꿔버렸다? 내 귀가 솔깃했다. 한 농민학교가 나라를 바꿀 수 있었다니, 어떻게 그게 가능했을까.
"농민들은 여기에서 배우면서 나 개인뿐 아니라 우리 농촌, 우리나라, 우리 역사를 바꿔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래서 졸업 후에 자기 고향에 돌아가서 모두 리더가 됐다. 때마침 붐이 일기 시작한 협동조합 운동도 자연스럽게 이들이 주도하게 됐다."그것은 '깨어있는 농민들'이 민주주의를 경험하는 소중한 과정이었다. 교장 선생님의 설명이 계속된다.
"협동조합은 1인1표가 아닌가? 부자건 가난한 사람이건 결정권에서 동등한 권리를 갖는다. 한마디로 평등하다. 당시 농민들에겐 이 새로운 경험이 매우 중요했다. 평등하게 협동하니 더 큰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경험을 한 것이다."교장 선생님은 그 경험이 오늘날의 덴마크를 행복사회로 만든 기틀이라고 보고 있었다.
"그때부터 농민들은, 우리는 작은 나라이니까 서로 돕자는 생각을 한 것이다. 서로 남이 아니라 다 연관돼 있다고 본다. 그래서 지금 우리는 세금 50%를 기꺼이 내고 있다. 내 돈으로 어려운 사람이 덕 보는 것을 보면 참 행복하다."내 돈으로 어려운 사람이 덕보는 것이 참 행복하다! 나는 그 말을 듣는 것이 행복했다. 닷새 동안이나 햇볕을 보지 못한 내게 마치 햇볕을 본 것처럼 내 마음을 따뜻하게 해줬다. 이 지구상에 사는 보통사람으로부터, 매일의 삶의 무게에 찌들어있는 이들로부터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교장 선생님은 티셔츠에 잠바를 걸친 이웃집 아저씨 같은 이였는데, 더 친근하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