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룬트비 도서관에 있는 그의 초상화.
김민지
세계적 미래학자인 랄프 얀센씨를 코펜하겐에서 만나 저녁식사를 했다. 우리에게 <드림 소사이어티> 저자로 알려진 덴마크인이다. 그는 덴마크가 왜 행복지수 세계 1위의 나라가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면서 그룬트비를 언급했다.
"우리 덴마크인들은 참 행운아들입니다. 우리 역사에서 그룬트비 같은 사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나는 어떤 말이 이어질지 짐작을 하면서도 "왜요?"라고 물었다.
"그는 민주주의에서 꼭 필요한 것들을 주창했어요. 민주헌법보다 중요한 것이 시민의 자유, 시민의 각성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시민교육에 열정을 바친 겁니다. 그는 지금 덴마크의 좌파와 우파 모두로부터 존경받고 있습니다."이 미래학자는 한 명의 리더가 한 사회를 바꾸는 데 얼마나 큰 역할을 하는지를 말해줬다. 래서 나는 궁금했다. 만약 그룬트비가 오늘의 덴마크 사회의 기틀을 만드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면, 그런 그룬트비는 누가, 무엇이 만들어냈을까?
이걸 우리의 질문으로 바꾸면 이렇게 된다. 대한민국을 행복사회로 다시 세팅하기 위해서는 리더와 시민이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한데, 행복사회를 위한 리더십은 어떻게 만들어질 수 있는가?
분명한 정신적 가치와 열린 사고그룬트비에 대한 나의 공부는 아직 얕다. 그래도 무엇이 그를 만들었는가를 한 번 중간 정리해보자.
첫째, 분명한 정신적 가치가 있었다. 그룬트비에겐 그것이 신앙의 힘이었다. 목회자로서, 크리스천으로서 그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 땅에서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다.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실천해야 한다는 소명의식이 그에게 있었다.
그룬트비의 이웃 사랑은 자선이나 도와주는 수준이 아니었다. 그가 폴크(Folke)라는 단어를 어떻게 '진화'시켰는가를 보면 그것을 알 수 있다. 덴마크 사회에서는 Folke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학교(Folkeskole), 교회(Folkekirten), 정당(Folkepart)의 이름에도 들어가 있다. Folke는 아예 문화가 되어 있다. Folke는 그룬트비가 유행시킨 말인데 그의 식대로 풀이하면 '민족성을 담지한 깨어있는 시민'정도가 되겠다. 네 이웃을 '깨어있는 시민'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그룬트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것을 덴마크의 문화와 시스템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룬트비는 이웃사랑이 평등사회 구현과 밀접하게 연관돼 있다고 보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너무 많이 가진 사람이 적고, 충분히 가지지 못한 사람이 더 적을 때, 우리 사회는 더 풍요로워진다." 덴마크의 사회복지 시스템은 이런 형제애와 평등의 가치 위에서 이뤄졌다.
둘째, 독서의 힘이다. 그는 청소년 시절 아버지의 권유에 따라 고향을 떠나 펠트 목사로부터 6년 동안 개인 교습을 받았는데 이때 방대한 독서를 했다. 종교, 정치, 역사, 어학 등 그의 전방위적인 관심은 이때의 독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셋째, 감성의 힘이다. 그룬트비는 어린 시절 노래 속에서 자랐다. 가족 분위기가 그랬다. 그래서 그룬트비는 감성이 풍부했다. 그는 시인이자 찬송가 작사·작곡가가 되었다. 오늘날의 덴마크 교회에서 불리는 찬송가 전체에서 그룬트비의 곡은 271곡이나 된다. 그룬트비가 작사·작곡을 것을 다 모으면 1400곡이 넘는다. 어떤 덴마크인은 그를 "다윗 이후 최고의 시인"이라고 말한다. 덴마크인들은 부활절, 크리스마스, 결혼식, 장례식 등에서 그룬트비가 지은 노래를 부른다고 한다. 그는 어떤 논리나 이론에 앞서 감성에서 덴마크인들을 이끌었다.
넷째, 열린 사고의 힘이다. 그룬트비는 애국자였으나 국수주의자가 아니었다. 조국을 사랑했으나 외국문화에 열려 있었다. 그는 1828년부터 왕립재정부의 지원을 받아 영국으로 가서 문학을 공부했다. 매년 3개월씩 3년간 영국에 머물 수 있었다. 이때 그룬트비는 세익스피어에 매료되었고 영국의 자유주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토론을 중시하는 옥스퍼드 대학의 자유로운 학풍에 매료되었다.
그룬트비는 자유로운 사고를 제약하는 어떤 것도 반대했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토론을 하는 것이 법이나 기관보다 더 민주주의의 핵심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반대의견을 가진 자를 제압하지 않고 오히려 환영했다.
"교회 안에서도 비판의 자유 있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