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의 흉상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아버지 박정기 선생
박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아버지 박정기씨, 1929년생이시다. 경남 동래(지금은 부산광역시)에서 중농 집안 종손으로 태어난 그는 1954년 부산수도국에 들어간 이후, 날마다 수도 파이프나 만지면서 외곬으로 33년을 보냈다. 정년퇴임 후에는 목욕탕이나 차려 '목욕탕집 주인'으로 남은 인생을 마감하는 게 당신의 소박한 꿈이었다. 그런 그가 1987년 1월 14일, 막내아들 종철군을 잃은 뒤부터는 전혀 다른 인생길을 걷고 있다. 아들의 죽음이 평범한 소시민을 꿋꿋한 민주 투사로 아버지의 운명을 확 바꿔놓았다.
나는 2002년 연말 한 원로 시인(고은 선생)의 출판기념회에서 박정기씨와 인사를 나눴다. 곧 만나기로 약속했지만, 차일피일 미루다 2003년 5월 9일에서야 이루어졌다. 마침 그날은 중간고사 날이라 오전 근무를 마치고 부지런히 창신동에 있는 민주화운동유가족협의회(약칭 유가협)를 찾았다.
이날 오후 3시, 종로구 창신동 '한울삶' 부근 한 찻집에서 만나 곧장 서울대학교로 향했다. 택시에 오른 뒤 기사에게 서울대학교로 가자고 부탁했다. 택시는 서울 역을 거쳐 남영동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곳 남영동 대공 분소는 박종철 열사가 고문치사한 장소가 아닌가?
나는 기사에게 양해를 구한 다음, 사진 두 컷을 찍고 다시 택시에 올랐다. 박정기씨는 겉모습만 조금 변했을 뿐, 그때와 별반 달라진 게 없다고 했다. 오후 4시 무렵, 우리는 서울대학교 관악 캠퍼스 인문대학 뜰에 세워진 '민주열사 박종철의 비' 앞에 도착했다. 박정기씨는 우선 비 앞에 참배객들이 두고 간 마른 꽃다발을 치운 뒤, 비 뒤에 놓인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1991년 10월 24일 종철이를 추모하는 벗들이"라고 새겨진 돌로 가서 새들이 남긴 하얀 배설물을 닦았다.
아버지는 이런 일들을 늘 해 왔듯이 매우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마치 대학 관리인처럼 스스럼없이 했다. 그는 과묵한 전형적인 경상도 사내였다. 청소가 끝나자 아들의 흉상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그 순간 얼마나 가슴이 아플까? 자식은 가슴에 묻고 산다는데….
"내가 이 비를 세운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여기만 오면 다른 분들에게 미안해요. 서울대학교에서만 민주화운동으로 죽은 이가 여럿이나 되고, 종철이 이전에 우종원, 최우혁, 김용권, 김성수 같은 이도 지금까지 의문사로 남았는데, 우리 종철이만 이렇게 비까지 세웠으니 정말 죄송해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사람은 한번 죽는데, 이름도 남기지 못하고 죽어간 사람이 얼마나 많나요. 종철이는 죽었지만, 그를 기억하는 이가 많으니 복이요, 그 복으로 내가 더 많은 자식을 얻었으니, 그 놈이 애비에게 잔뜩 복을 안겨주고 간 거지요. 여태 자식의 시신도 못 찾은 이도 얼마나 많습니까?"득도한 스님 같은 말씀이었다. 마침 가까운 등나무 아래 나무의자가 있기에 나란히 앉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