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성술 의병장
오용진
오성술(吳成述) 의병장은 16세 결혼하였지만 슬하에 자식이 없었다. 오 의병장이 의병에 투신한 뒤로는 거의 집에 머물지 않았으니 부모로서는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게다가 오 의병장은 장손이요, 외아들이었다.
오성술 의병장이 일군에게 체포되기 전 해(1908년), 마침 오 의병장 어머니는 마을 근처에 아들 의병부대가 주둔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어머니가 부대로 찾아가 아들에게 옷이라도 갈아입고 가라고 간곡히 부탁하자 오 의병장은 차마 그 청을 거역할 수 없어 집에 왔다.
오 의병장이 남 몰래 집으로 와 옷 갈아입으려 방에 들어가자 어머니는 며느리(금성 나씨)에게 방으로 들어가게 한 뒤 밖에서 문고리를 잠그고 방문을 당신 치마로 가렸다. 그로부터 열 달 뒤 옥동자가 태어났다.
"제 아버님을 점지해 주신 삼신할머니와 조상님이 고맙습니다."오용진 선생은 조상님께 고맙다는 말씀을 몇 차례나 했다. 당신 집은 나주 오씨 종가로 그동안 직계 자손이 없어 양자를 들인 일이 없었다는데, 국난 중 단 한나절 방사에도 대를 이은 신통함이 조상의 도움이나 삼신할머니의 점지 없이 어찌 가능하겠느냐는 얘기였다.
오성술 의병장은 아들이 태어난 지 석 달 뒤 일본 헌병대에 붙들렸다. 오 의병장은 광주감옥에서 대구감옥으로 이감 되었다. 당시에는 교통이 불편하여, 광주에서 영산강 포구로 가 거기서 배를 타고 목포로, 부산으로, 부산에서 열차로 대구에 갔던 모양이다. 오 의병장이 일본 순사에게 포박된 채 영산강 포구를 떠나게 되었다.
부인은 그 기별을 받고, 어쩌면 이 세상에서 마지막이 될 부부, 부자상봉을 위해, 석 달된 아들을 포대기에 안고 포구로 달려갔다. 이 세상에서 아비와 아들은 영산강 포구 뱃전에서 첫 상봉이자 마지막 상봉을 하였다. 아비는 수갑에 채이고 오랏줄로 꼭꼭 묶인 채 포대기의 아들을 보고서는 사내대장부가 처자에게 눈물을 보일 수 없었던지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룻배에 올랐다고 했다. 아마도 이들 부자는 이심전심의 대화를 나누었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