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랑촌마을의 통나무 굴뚝이 있는 집
박도
어랑촌 전투는, 1920년 10월 22일 아침부터 어랑촌 마을을 중심으로 우리 독립군과 일본군들 간 교전이 종일토록 계속되었다. 이날 어랑촌 전투에는 독립군과 일본군 양측 모두 최대의 전력을 투입하였다.
그 당시 이 일대의 청산리전투에 참전하였던 이범석 장군은 자서전 <우둥불>에서 일본군 전상자는 1000여 명으로 추산하였고, 박은식 선생의<한국독립운동지혈사>에서는 일본군 사상자가 1200명이었다고 기록하였다.
오늘의 어랑촌은 50여 호 집들이 듬성듬성 어우러진 마을로, 절반가량의 집들은 아직도 1920~30년 당시 모습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다. 토담집에 초가나 나무 널빤지로 지붕을 덮었고 굴뚝은 홈을 판 통나무였다.
천수평 전적지다음 행선지는 청산리전투지의 하나였던 천수평(泉水坪) 전적지였다. 어랑촌을 벗어나 서남쪽으로 달렸다. 마침 소달구지를 몰고 가는 호로(胡老:중국 노인)에게 천수동을 물었더니 조금만 더 가면 된다고 했다. 하지만 얼마를 달려도 천수동 마을이 나타나지 않았다.
우리 일행은 승용차로 비포장도로를 10여 분 달리자 그제야 깊은 계곡 속에 천수동 마을이 나왔다. 중국인들의 거리 관념은 우리와 다르다는 걸 알았다. 그들은 국토가 넓은 대국인이라 '조금'이란 단위가 몇 10킬로미터였다. 천수평 전적지는 지금은 천수동 마을 '길림성팔가자림업국천수동림장'(吉林省八家子林業局泉水洞林場)이 들어선 곳이었다.
1920년 10월 22일 꼭두새벽에 이동 중이던 우리 독립군은 갑산촌 주민들로부터 이웃 천수평에 일본군 기병 1개 중대가 야영하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독립군은 곧장 강행군을 계속하여 마침내 천수평에 이르렀다. 그때가 오전 5시 30분 무렵으로 아직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 시각 일본군 기병 1개 중대 120여 명은 독립군이 접근해오는 사실을 전혀 모른 채,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때 독립군은 일본군 야영지를 완전 포위하여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갑작스런 독립군 공격에 미처 잠에서 깨어나지 못한 일본군은 전의를 잃고는 허둥대기만 했다. 이 전투에서 독립군은 일본군 기병 1개 중대 120여 명 가운데 어랑촌 본대로 탈출한 4명을 제외한 나머지 병력을 전멸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