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대 대통령선거 날인 지난해 12월 19일 오전 서울 강남구 언주중학교에 마련된 삼성2동 제3투표소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기표를 마친 뒤 기표용지를 투표함에 넣고 있다.
사진공동취재단
많은 사람들이 한국이 절차적 민주주의는 성취했으나 내용적 민주주의에서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말한다. 절차적 민주주의는 말 그대로 국민의 민주적 참여를 보장하는 절차에 관한 것으로, 한국에서 선거 경쟁 만큼은 민주적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다.
내용적 민주주의는 민주적 과정을 통해 선출된 정부가 국민 다수가 누릴 수 있는 정책적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을 뜻한다. 요즘 흔히 이야기하는 '경제 민주주의'가 좋은 예이다. 그런데 한국은 과연 절차적 민주주의를 성취한 것일까? 이제 경제적 민주주의에 집중하면 되는 것일까? 이런 낙관적 판단에 의문이 제기되는 몇 가지 점을 논의해 본다.
우선, 절차적 민주주의에서 가장 핵심으로 이야기되는 선거 경쟁에 대해서 살펴보자. 민주주의 선거는 1인 1표라는 매우 민주적인 제도임과 동시에, 대표자를 선출하여 통치하는 매우 '제한적인' 제도임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직접 민주주의, 전원 참여 민주주의는 작은 단위에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국가적 차원에서는 불가능하다.
단적인 예로 100명이 모여서 오늘 저녁 무슨 음식을 먹을지를 결정하려면 어떤 상황이 펼쳐질지 상상해보라. 그래서 수천만 명의 국민을 대신하여 국가를 운영할 대표자를 선출한다. 즉 민주주의는 국민이 직접 통치하는 제도가 아닌, 선출된 대표자를 통한 위임 통치 제도이다.
문제는 여기서 발생한다. 권력을 위임한 국민과 권력을 위임받은 대표자 사이에는 간극이 일어날 수밖에 없다. 권력을 위임받은 자들은 손에 쥔 권력으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고 싶어하게 되고, 권력을 위임한 국민들은 대표자들을 불철주야 일거수일투족 감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선거, 국민과 대표자 사이의 '불완전한 계약' '성실한 위임'이라는 선거의 계약을 위반한다면 권력을 돌려줘야 하지만, 대의 민주주의 하에서 이런 계약 위반을 처벌할 방법은 다음 선거까지 기다리는 것 외에 없다. 따라서 민주적 선거란 국민과 대표자 사이의 매우 '불완전한 계약'이다. 민주주의는 링컨의 유명한 말처럼 "국민에 의한 정부"일 수는 있으나 "국민을 위한 정부"를 보장하는 제도가 아니다.
이런 불완전한 계약을 보완하기 위해 국민소환제, 국민탄핵제, 국민투표제, 또는 시민저항을 통한 직접적 의사 표시 등을 보장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깨어 있는 시민사회가 필요하다. 임기 중 일어나는 대표자의 계약 위반에 대해 국민이 목소리를 내고, 그런 대표자에 대해 처벌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런 불완전한 절차적 민주주의를 그나마 유의미하게 만드는 전제는 국민 개개인과 정치적 결사체들이 자신의 다양한 의사를 자유롭게 개진할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다. 민주주의는 온갖 사상이 쟁명하는 사상의 자유시장을 보장해야 하고, 국민은 이 사상의 시장에서 각자가 옳다고 생각하는 입장과 정책을 주창하고 선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선거를 통해 유권자 다수의 선택을 받은 정치세력이 정해진 임기 동안 통치의 권한을 위임받는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한 사이클이다. 즉 절차적 민주주의는 1인 1표라는 선거뿐 아니라, 그 기본 전제로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가 공존해야 한다.
이는 우리가 저마다 처지와 생각이 다르기 때문이다. 국민 개개인을 비롯한 사회의 다양한 집단, 계급이 서로 생각이 다르고 추구하는 정책이 다른 것은 당연하다. 자본가가 자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정당하듯, 노동자가 노동자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 또한 정당하다. 전자는 국가 발전이고 후자는 밥그릇 싸움이 아니다. 따라서 사상의 자유, 표현의 자유, 결사의 자유는 모두에게 '평등하게' 부여되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
18세기 사상가 볼테르의 말대로,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 당신이 발언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울 것이오"라는 것이 절차적 민주주의의 근간이다. 여기서 핵심은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이다. 민주주의와 압제정치의 결정적 차이는 나와 입장이 다른 세력을 무력으로 압도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와 다른 주장을 한다고 입을 틀어막거나, 매도하고 각색해버리거나, 직업과 재산을 빼앗거나, 감옥에 집어넣거나, 극단적으로는 암살, 처형시켜버린다면 이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민주주의의 핵심은 "나는 당신의 주장에 동의하지 않지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