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와 아름이이 눈빛에 넋을 놓았다.
이현진
고민하던 중 '가을이'를 만났다. 400마리의 유기견들을 다 기억할 순 없는데, 일상으로 돌아와 사진을 보다가 가을이의 눈빛에 일시정지 된 것이다. 귀가 뾰족하고 눈에는 쌍꺼풀이 있다. 지저분한 이불 위에 짝꿍 아름이와 꼭 붙어있다.
짧은 다리는 다부지다. 하얀 바탕에 회색, 연갈색 무늬. 사실 내 눈에 예쁘지 않은 개는 없기에 외양 묘사는 무의미하고, 보호소 소장님의 '최소 10년'이란 말씀이 가을이를 입양하기로 결정하는 데 결정적이었다. 운명의 데스티니.
'평강공주 유기견 보호소'는 1992년 설립된 '생명의 집'에 있던 개와 고양이들이 현재의 보호소 소장님과 함께 2005년 이전하여 현재까지 운영되고 있다. 가을이는 '생명의 집'에서부터 있어 온 아이다.
"2003년인가…. 어떤 남자 분한테 구조돼서 왔는데…."
한 평 남짓 견사에서 최소한 10년을 지내왔다고 생각하니 말문이 막혔다. 똑같은 사료, 똑같은 벽. 잠시 왔다가 가는 봉사자들. 추위, 더위, 엄청난 소음. 개의 즐거움인 달리기나 땅파기는 절대 할 수 없는 상태로 긴 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더군다나 가을이는 품에 안길 크기도 아니고 이름 있는 종류도 아니고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라 이렇게 보호소에서 여생을 마칠 확률이 컸다. 남은 날들이라도 따뜻하게 지내게 해주자 마음먹고 채비를 서둘렀다.
2월 7일 추운 저녁, 가을이는 컨테이너 형태인 '봉사자 탈의실'에서 새가족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제껏 보아온 얌전한 모습이 아닌 극도로 긴장한 상태. 송곳니를 드러내며 다른 개들에게 "콰릉!" 무섭게 짖었다. 자자, 흥분을 가라앉히고 새엄마에게 오렴.
차에 타자마자 가을이는 언제 그랬냐는 듯 의젓해졌다. 개의 호기심과 들뜸은 어린 아이와 많이 비슷한데, 차 안에서의 불안한 상태는 더욱 그렇다. 창밖을 보다가 자세를 뒤집다가 보채다가 멀미를 하다가. 이게 차를 처음 탄 보통 개들의 모습인데 가을이는 내 무릎 위에서 잠시 머물더니 발딱, 패드를 깔아놓은 옆자리로 옮겨 앉는다.
네 발을 오므려 고개를 파묻은 자세에 한 치도 끼어들 틈이 없다. 그러곤 곧 색색-숨이 깊어졌다. 벌써 잠들었나? 고마울 따름이다. 먼 길 힘들어할까봐 얼마나 걱정을 했는데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마냥 태연하다. 가을이는 내릴 때까지 딱 한 번 패드를 박박 긁어 자리를 재정비한 뒤론 움직이지 않았다. 90여 분간, 여느 인간보다도 점잖은 가을. 보드라운 털을 마구 껴안고 싶었던 나는 서운하면서도 신기하기만 했다.
"대소변을 한 번에 가렸다!"누추하지만 너의 스윗홈이 될 곳이란다. 현관에 내려놓으니 재빨리 소파 위에 올라가 다시금 반듯하게 앉는다. 눈만 또롱또롱 굴리며 미동도 없다. 무슨 생각을 할까? 귀만 쫑긋쫑긋. 사료도 물도 관심 밖. 오늘은 이렇게 마무리해야 하나? 가을이의 도착을 목 빠지게 기다리던 친구들에게 소식을 전한다. 입을 꾹 다물고 눈만 띵그런 사진을 찍어 전송하니 친구들 말하길, "가을이 너 닮았어!"
정말? 결국 나는 나 닮은 반려견을 선택한 건가? 아무려나 기쁘다. 가을이와의 삶이 조금 더 따뜻해질 것 같아 심장이 마구 뛴다. 내일은 맛있는 밥도 먹고 산책도 하고 예방주사도 맞자, 가을아!
가을이의 표정은 '다 안다' 같다. 정말 다 아는 것 같다. 동물병원에서도 '보호소에서 10년'이면 '그럴 수 있다'고 한다. 정말일까?
가을이는 한 번 간 길은 기억한다. 한 번 한 행동도 기억한다. 나의 행동 패턴을 기억한다. 믿을 수 없다고? 그렇다면, 이 말엔 모든 견주들이 감탄할 거다. "대소변을 한 번에 가렸다!"
이 아이는 내 집에 발 디딜 때부터 마음의 준비를 한 낌새더니 한사코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다. 어디 네 녀석의 영특함이 어디까지인지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