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모임에서 농촌복지공동체 사례를 발표하고 있는 강위원 대표. 진정성은 그의 또 다른 매력이자 무기이다.
최성욱
'이렇게 바뀌었다'고 말하고 싶다 했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의 말처럼 '원래 꿈꿨던 자리로 돌아간 것'인지 모른다. 그는 감옥에 있을 때 사회복지를 하려 마음먹었다고 한다. 그가 처음 감옥에 들어간 건 1989년. 강 대표는 '광주지역고등학생대표자협의회(광고협)'을 만들어 의장으로 활동하며 '전교조 지원 투쟁'을 하다가 구속되고 학교에서 제적되었다.
그때 광주교도소 특사 독방살이를 하던 '기라성 같은 운동권 선배들'을 그는 출소 후 검정고시를 마치고 찾아보았다. 혁명운동하고 있을 줄 알았던 그들은 평범한 생활인으로 살면서 운동과는 전혀 거리가 먼 삶을 살고 있었다. 그에겐 큰 충격이었다. 그리고 학생운동의 뜻을 오래되고 길게 유지하려면 "밥도 되면서 꿈이 되는 자기전문성 필요하다는 현실적 고민을 많이 하게 됐다"고 한다.
"두 번째 출소 후에 2년 동안 한총련 합법화 운동을 하고 2003년 말 대구에 있는 한 농촌사회복지시설로 갔어요. 거기서 2007년 2월까지 일했어요. 그곳 대표님이 과 학생회장할 때 자매결연 맺었던 지체장애시설의 보모님이셨어요. 심리적으로 광주와는 먼 곳으로 가고 싶었어요. 집중할 수 있을 것 같아서였죠. 말 그대로 다 끊고 대구로 갔어요.
시설에 근무하면서 사이버로 사회복지사 공부하고 현장인 작은 농가시설에서 자원봉사 하다가 법인 사무국장으로 채용되기도 했어요. 거기서 그렇게 3년 6개월을 일했습니다. 그곳이 규모 있는 시설이었다면 사회복지 관행 같은 것을 배우게 돼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또 시설 운영하는 분의 철학이 훌륭해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사회복지 초년생시절이었습니다."대구에서의 경험은 새로운 농촌공동체 모델에 대한 고민을 싹 틔워주었다. 그는 '중심보다는 변방으로, 복판보다는 가장자리로 가야겠다'며 뜻을 같이할 이들을 규합했다. 평생동지인 권혁범·이영훈씨가 바로 그들이다. 그들은 1년 동안 만나면서 새로운 복지공동체에 대해서 공부했다. 그 공부모임 인터넷 카페 이름이 '여민동락'이었다. <맹자> 양혜왕 편에 나오는 "민초와 함께 즐거움을 같이한다(與民同樂)"는 말이다. 여민동락은 그들이 영광에 뿌리 내린 농촌공동체 이름이 되었다.
'전국구' 인물이 고향으로 돌아온 까닭영광은 강 대표의 고향이다. 이른바 '귀농귀촌 십계명'의 으뜸 조항은 '고향으로 가면 절대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강 대표는 2007년 고향 영광으로 들어갔다. 결단의 중심엔 어머니가 있었다. 두 번 교도소를 다녀오고, 서울이며 대구로 떠돌다가 사는 동안 어머니는 세월 따라 주름마저 깊어갔다. '자식 노릇 한번 해보자'는 작은 사심으로 고향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대학까지 나온 멀쩡한 자식이 다 쓰러져 가는 농촌으로 돌아오는 것을 반기는 어미는 없다. 한총련 의장까지 지낸 '전국구' 인물이 고향으로 돌아오는 것을 환영하는 동네인사는 드물다.
"어머니는 '십년 뒤면 노인들 다 죽어 몇 명 살지도 않을 것인데 큰일 할 줄 알았더니 노인들 똥 기저귀나 빨러 오냐'며 극구 반대하셨어요. 지역 주민들은 대학 나와서 도시에서 시골로 오는 것을 실패로 보고, 영광군 식자층은 6.2지방선거 앞두고 '강위원이가 정치하려 하나' 의심했고요. 심지어 관변단체들은 '한총련 빨갱이 왔다'고 네 시간 동안 항의하고 가기도 했어요. 또 어떤 분들은 '강위원 같은 사람이 정통 운동해야지 한가롭게 학교 살리기하고 노인복지, 농촌살리기나 하냐'고 힐난했어요. 마음 많이 아팠지요. 새로운 길 가다 보면 반드시 돌부리에 치이는 법이니까 입 닫고 오로지 현장에만 집중하자며 견뎌냈어요.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현장이니까요."그렇게 1년이 지나니 제일 먼저 주민들이 나서서 그를 안아주었다. "밥은 묵고 살아야제"하며 쌀을 내려놓고 가고, "마늘 까서 줘야쓴디 그냥 갖고 와 미안하네"하며 김장에 쓰일 양념재료를 얼른 내려놓고 후다닥 가버리는 마을 어른들이 그를 울렸다.
"제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요샌 농촌사람 더 징해야'하는 말입니다. 그 말을 거꾸로 하면 주민들을 그렇게 대했다는 것입니다. 주민들을 존엄하게 대하면 반드시 존엄하게 반응합니다. 이해관계로 규정하고 대하니까 반응이 그렇게 나오는 것이지요."강위원과 여민동락의 '행복지수 높은 농촌공동체' 실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