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세자가 갇힌 것과 비슷한 크기의 뒤주. 경기도 수원시 팔달구 화성행궁 안에 전시돼 있다.
김종성
영조는 상대적으로 강인했다. 경종이 영조(당시는 연잉군)가 보낸 게장을 먹은 뒤에 디저트로 생감을 먹고 급사했는데도 그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왕위에 오른 것을 보면, 영조가 꽤 비정한 인물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자기 아들이 경종처럼 유약해지지 않고 자기처럼 강해지기를 원했다. 그래서 생후 100일의 아기를 떼어놓은 것이다.
영조의 교육방식은 어느 정도 주효했다. 이 점은 원자(차차기 왕위계승권자)나 세자의 성장과정을 정리한 궁중 문서들에서 잘 나타난다. <한중록>이나 <장헌대왕 지문(誌文)>에 인용된 이 문서들에 따르면, 사도세자는 생후 7개월 만에 동서남북을 가리켰고, 두 살 때 글을 배워 60개 정도의 글자를 썼으며, 세 살 때는 남이 과자를 주면 목숨 수(壽)나 복 복(福)자가 쓰인 것만 골라 집었다고 한다. 그는 일종의 '엄친아'였다.
사도세자의 천재성은 그가 나이 10세에 여당 격인 노론세력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비판한 사실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런 만만치 않은 왕자가 15세부터 세자 겸 대리청정(대통령 권한대행) 역할을 맡았으니, 집권세력이 얼마나 불안해했을지 짐작할 수 있다.
이런 천재성은 훗날 그가 뒤주에 갇힌 실질적 요인 중 하나였다. 적당히 똑똑한 천재는 말을 태워 청국(淸國)으로 유학 보내지만, 달갑지 않은 천재는 뒤주에 태워 천국(天國)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집권층의 생리일까.
부모의 품에서 떨어졌더라도 보육환경이 좋았다면, 세자는 안정적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행운마저 주어지지 않았다. 그의 처소인 저승전은 경종의 부인인 선의왕후가 지내던 곳이고, 그의 음식을 준비하는 곳은 장희빈이 지내던 취선당이었다. 경종은 영조와 대립했고, 경종의 어머니인 장희빈은 영조의 어머니인 최숙빈(숙빈 최씨)을 죽이려 했다. 영조 쪽 사람들에게 음습한 느낌을 주었을 공간들이 일찍부터 사도세자와 연관되었던 것이다.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두 살 때 동궁(세자궁)을 새로 꾸릴 때에 충원된 궁녀들은 선의왕후를 모시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궁중 법도에 따라 왕후의 사망 뒤에 출궁했지만, 영조는 그들을 도로 불러 사도세자를 돌보도록 했다.
한 주인에게만 충성을 다하는 궁녀들의 특성상, 그 궁녀들은 주군인 경종 및 선의왕후와 적대적이었던 영조에 대해 좋은 감정을 갖고 있을 리 없었다. 어쩌면, 경종을 독살했다는 혐의를 받은 영조가 자신의 결백을 보여주기 위해, 일부러 자기 아들을 경종 쪽 궁녀들에게 맡겼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부모와 떨어진 상태에서 적대적인 궁녀들 속에서 성장했으니, 그가 얼마나 눈치를 많이 보면서 자랐을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도세자는 집권세력으로부터도 고립됐다. 어려서부터 그들의 문제점을 비판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버지의 탕평정치를 실현시키고자 원칙적으로 행동했지만, 이런 행보는 그에게 정서적 고립에 더해 정치적 고립까지 안겨주었다. 처가인 홍씨 가문까지도 그를 죽이는 데 가담한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고립되어 있었는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아버지와의 갈등도 그에게는 말할 수 없는 상처였다. 영조는 자기 아들이 집권당 인사들과 갈등을 빚는 것을 보고, 그들에게 뭐라 할 수는 없으니까 자기 아들한테만 한층 더 가혹하게 대했다. 아들은 항상 아버지의 사랑을 갈망했지만, 아버지는 그 흔한 '하트' 표시 한 번 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