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궁>에서 김개시 역할을 했던 이영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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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김개시. 상궁 김개시(이영애 분)를 소재로 한 1995년 KBS2 드라마 <서궁>을 시청한 사람들은 실제의 김개시도 꽤나 예뻤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실제와 드라마는 정반대였다. 김개똥 혹은 김가희라고도 불린 김개시는 상당히 못난 외모로 유명했다. 오죽하면 그의 외모가 역사기록에까지 남았을까. 광해군 5년 8월 11일자(1613.9.24) <광해군 일기>에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김 상궁은 이름이 개시다. 나이가 들어서도 용모가 피지 않았으며,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金尙宮名介屎. 年壯而貌不揚, 兇黠多巧計.)'나이가 들어도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것은 한마디로 못생겼다는 뜻이다.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오늘날 우리처럼 남의 외모를 지나치게 직설적으로 표현하지 않았다. 웬만해서는 외모를 평가하지도 않았다.
그런데 김개시의 경우는 외모가 하도 '특별'해서 사람들의 입에 회자될 정도였기에 그 점을 사료에 기록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렇다고 직설적으로 평가할 수도 없었기에 '용모가 피지 않았다'는 우회적 표현으로 그의 외모를 평한 것이다.
그럼, 김개시는 '고운 마음'으로 광해군의 관심을 끌었을까? 그것도 아니다. 그 이유는 위의 <광해군 일기>에서 부분적으로 소개됐다.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기 때문에 광해군의 마음을 샀던 것이다.
<광해군 일기>는 광해군 정권을 전복한 사람들에 의해 기록된지라, 이 책에서는 광해군 쪽 사람들의 인간성이 나쁘게 묘사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는 평가가 나온 것이다.
정적의 외모는 있는 그대로 평가하더라도 정적의 인간성만큼은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 조선왕조실록의 특징이다. 조선시대에는 외모의 비중이 오늘날에 비해 현저히 낮았다. 그에 비해 인간성이 매우 중시됐기 때문에, 역사의 승자는 패자의 인간성만큼은 어떻게든 폄하하려 했다.
'교활하고 계략이 많았다'는 표현은 승자의 관점을 반영한 것이므로, 이것은 중립적 관점에서 수정해야 한다. 이 표현은 '영리하고 아이디어가 풍부했다'로 이해해야 한다.
정치 활동 위해 후궁 자리 거절하기도위의 <광해군 일기>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우리는 김개시가 그런 두뇌를 바탕으로 광해군 정권을 막후에서 지원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김개시는 핵심적인 국정 현안에서 광해군에게 조언을 했을 뿐만 아니라, 광해군 쪽 사람들과 접촉하기 위해 궐 밖으로 자주 외출했다. 그가 광해군 정권의 몸통이라는 점은, 광해군의 계모이자 정적인 인목대비의 입장에서 기록된 <계축일기>에서 김개시가 이 정권의 원흉으로 지목된 데서도 잘 드러난다.
김개시는 본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후궁이 될 수 있었다. 그가 일부러 후궁 자리를 거절한 것은 자유롭게 정치활동을 하기 위해서였다. 궐 밖으로 수시로 나가 광해군 정권의 지지기반을 다지고자 했던 것이다. 그는 광해군이 갈 수 없는 영역으로 가서, 광해군이 할 수 없는 일을 처리했던 것이다.
당시의 반대파들은 그가 궐 밖의 남자들을 만나러 다닌다고 손가락질했지만, 그것은 근거가 불충분한 흑색선전에 불과했다. 그는 비상한 머리를 무기로 광해군의 개혁정치를 지원하는 데에 일차적 관심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광해군이 그를 좋아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