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 히로부미
눈빛출판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그에 대한 평가는 한일 양국에서 극과 극이다.
우리나라에서는 나라를 빼앗아간 침략의 원흉이지만, 일본에서는 제국주의 반석에 올려놓은 근대 일본의 아버지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1841년 10월 14일 일본 스오구니(周防國, 현 야마구치 현 히카리 시)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쇼가손숙(松下村塾)에서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에게서 배웠다.
젊었을 때는 영국공사관을 습격하고, 국학자인 하나와 다다토미(塙忠宝)를 암살하는 등 열혈 과격파였다.
그는 초슈(長州)의 지도자들에게 빼어난 능력을 인정받아 발탁되어 그들의 주선으로 영국유학을 다녀왔고, 그 뒤 출세를 거듭하여 초대 내각총리(총리대신 4회 역임), 초대 추밀원장을 지내는 등, 근대 일본의 가장 훌륭한 정치가 가운데 하나였다. 일본인들은 1963년부터 1984년까지 그들이 가장 많이 썼던 1천 엔(圓) 지폐에 그의 초상을 담을 만큼 대단한 인물로 추앙하고 있다.
1905년 11월에 을사늑약 후, 대한제국 통치를 위해 조선통감부가 설치되자 이토는 초대 통감(총독)으로 취임했으며,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실질적인 지배권을 행사했다. 이 시기 그의 정책은 결국 조선에 반감을 불러왔다.
1907년 7월 이토는 헤이그 밀사 사건을 빌미로 고종을 강제로 양위시켰다. 이러한 그의 공이 인정되어 67세 때 일본 최고위 작위인 공작(公爵)을 수여받았다. 1909년 조선 통감을 사임하고, 추밀원 의장으로 복귀하였다. 이토 히로부미는 천민의 아들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인 내각총리를 네 번이나 역임한 입지의 인물이지만 죽음은 그를 피해가지 않았다.
1909년 10월 초순, 예순 여덟인 이토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했는지 해외유학 준비 중인 아들을 오이소(大磯) 자택으로 일부러 불렀다. 아들 분키치는 그때 스물네 살로, 이토가 본부인 이외 여인에게서 얻은 늦둥이였다. 이토는 아들에게 일렀다.
아들에게 남긴 말"사람에게는 타고난 천분이 있다. 나는 너에게 아비의 뜻을 계승하라고 강요하지 않는다. 타고난 천분이라면 비록 네가 거지가 되더라도 결코 슬퍼하지 않을 것이며, 부자가 되더라도 기뻐하지 않을 것이다."이어 이토는 천황에 대한 충성을 강조한 뒤에 이렇게 말했다.
"충성 다음으로 필요한 것이 지성(至誠)이다. 지성은 귀신을 울게 하고 천지를 움직인다고 하는데, 이는 진실이다. 나는 젊은 시절부터 심신을 군주에게 바치고, 나라를 위해 최선을 다하려고 노력해 왔다. 이 마음은 오로지 지성이란 단어로 집약된다. 반드시 귀신을 울리고 천지를 움직여 보이겠다고 다짐했다. 너도 충의 다음으로 지성이란 글자를 깊이 가슴에 새겨라.""
읽는 학문도 필요하지만 듣는 학문도 필요하다. 사람은 살아있는 책이어야 한다. 서양에 도착하면 사람들과 많이 접촉해 식견을 넓혀라. 그 누구와 만나 그 어떤 문제를 토론하더라도 대화 상대가 될 수 있어야 한다. 사물에는 반드시 겉과 속이 있다. 넓고 깊게 사물의 안팎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이 안목이다. 정밀한 관찰은 서양인의 특색이며, 조잡한 관찰은 동양인의 약점이다.""사물에는 이루어지는 순서가 있다. 돌발적이거나 서둘러서는 안 된다. 상식적이고 주도면밀한 운용이 필요하다. 천하의 일을 추진하노라면 목숨을 걸어야 할 경우가 생긴다. 나는 지금까지 살아 있다는 것이 이상할 지경이다. 너도 네 뜻을 이루려면 죽음을 각오하라. 의존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힘에 의존하지 말고 네 힘으로 해라."먼 길을 떠나며 아들에게 마치 유언을 하는 듯하다. 이토는 출국 전 국제신문협회 초청 연설 뒤 한 외신기자가 질문했다.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처했던 과거의 체험을 떠올릴 때가 있는가?""나는 항상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과거에는 다소 목숨에 애착을 가졌으나 요즘에는 덤으로 살고 있다고 여긴다. 국가에 도움이 된다면 기꺼이 죽을 수 있다. 내가 우려하는 마지막 문제는 대한제국이므로 그 문제만 해결되면 걱정할 것 없다."이토는 자신의 죽음을 예감한 듯하다. 1909년 10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그의 마지막 여정을 살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