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강제 징용 노동자 김한수(92) 씨. 정면으로 보이는 하얀색 건물들이 미쓰비시 조선소 건물이다.
오마이뉴스 장재완
우리는 다시 미쓰비시 조선소가 보이는 언덕으로 이동했다.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공장을 바라보는 김씨는 손짓을 하면서 당시의 현장을 자세히 설명해 냈다.
"이쪽 하얀 건물에 일본인들 기숙사가 있었고, 저쪽으로 내려가면 해안선이 구부러져 있었고… 그리고 그 끝쪽으로 가다가 내가 일하던 곳이 있었는데, 지금은 저 건물들이 들어서서 잘 보이지 않네…."김씨는 또 "저쪽 끝에는 가미가제 잠수함을 만드는 곳이 있었어… 내가 반장에게 물어봤더니 묻지 말라고 하더구먼… 그놈들이 그랬다구"라고 덧붙이기도 했다.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김씨는 공장에서 이데기(부공장장쯤 되는 일본인)씨의 회중시계를 고치던 중 '번뜩'하는 푸른빛을 보았다고 했다. 그리고 갑자기 이데기씨가 '적이다'라고 소리치면서 뛰기 시작했고, 그 뒤를 따라 도망을 쳤는데, 철문이 떨어져 김씨를 덮쳤다.
잠시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났고, 자신을 붙잡는 무언가(철문)를 계속해서 뿌리치면서 밖으로 튀어나갔다. 밖은 온통 시체와 부상자로 덮여 있었다. 까맣게 타버린 시체들, 팔다리가 떨어진 사람, 눈알이 빠져나온 사람들, 말 그대로 '지옥'이었다.
김씨도 목덜미에 큰 상처를 입는 등 심각하게 다쳤다. 그로 인해 김씨가 입었던 하얀색 옷은 온통 피범벅이 되었다. 그렇지만 널브러진 시체와 사경을 헤매는 수많은 부상자들에 비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그 장면. 그러나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하는 그 장면. 핵의 위험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되는 그 장면을 김씨는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다(김한수 씨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이전 기사 참고
"우리는 인간 이하의 노예생활을 해야 했다").
김씨는 원폭이 있던 첫날, 이데기씨를 찾으러 나가사키 시내에 나갔다고 했다. 시내의 언덕에 그의 사택이 있었기에. 그러나 그 사람을 찾지는 못했다. 대신, 초토화된 시내를 보았다. 시체가 나뒹굴었다고 했다. 끔찍했다고 했다. 그래서 무서워서 다시 시내에 나가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그 다음날에는 자신을 괴롭힌 반장을 잡기 위해 돌아다니기도 했다고 했다. 잡아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찾지 못했다.
일본 공장 책임자는 조선인 노동자들을 모아 놓고 "할 말이 없다"는 말로 모든 것을 끝냈다. 돌아가라는 말도 없었고, 그렇다고 계속 남아 있으라는 말도 없었다. 사실 그 당시 모두 파괴된 상황에서는 그 말밖에 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돈은 구경도 해 보지 못하고 그렇게 노동과 폭력에 시달리다 원폭 피해자가 된 김씨는 두 달 가까이 나가사키에서 보냈다. 부상자 구호와 치료활동도 했고, 딱히 또 할 일도 없이 그렇게 나날을 보내다가 아주 어렵게 목선을 구해서 한국으로 돌아왔다. 자신과 함께 일하던 그 수많은 조선 노동자 중 오로지 자신 혼자만 돌아왔다고 했다.
나가사키 시립 원폭자료관과 폭심공원